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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들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소크라테스, 기원전469~399년경)
    philosophy/the ancient world 2022. 6. 10.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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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들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소크라테스, 기원전469~399년경)

    socrates,BC469~399
    socrates,BC469~399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 아테네에서 조각가인 아버지 소프로니코스와 산파(产婆)였던 어머니 파이나레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서민가정이었다. 게다가 직업을 세습하던 당시 문화도 있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 역시 어린시절과 청소년기에는 석공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석공 기술을 배우며 자랐다고 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동안에도 틈틈이 철학, 기하학, 천문학 등을 공부했고, 이후 군대에 가게 되어 보병에 편입, 청년에서 40세까지 세 번에 걸친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펠로폰네소스전쟁(Peloponnesian War)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그는 아테네로 돌아와 잠시 동안 정치학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에게 남겨진 유산으로 일하지 않고도 아내 크산티페(Xanthippe)와 살 만큼 충분한 돈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는 그때부터 동료들과 철학적 토론을 벌이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서양철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흔히 언급되지만 저서도 남기지 않았고, 학파를 설립하지도 않았으며, 자신만의 특별한 이론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우주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해석론을 살펴보면서 자연철학을 연구했던 그는 도시국가의 정치학에 몰두하기도 했고, 정의의 본질과 같은 실제적인 윤리 쟁점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논쟁에서 이기는 일이나 동시대인들처럼 돈을 벌기 위해 논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어떤 해답이나 해석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지식을 얻는 것이 단순한 오락거리나 호기심의 문제가 아닌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저 선, , 정의 등과 같은 우리 자신에게 적용될 개념들의 근거를 탐구했고,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 철학의 최초 과제라고 믿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업적은, 집요한 의문을 제기하여 사람들의 지식을 조사하는 새로운 방식을 이끌어냈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 또는 변증법(변증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서로 반대되는 견해들이 대화로 진행되기 때문이다)’이라고 불리는 것들이었는데 바로 이런 방식으로 신들이 모든 것들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답안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이런 식의 문답이었다.

    -질문: 당신은 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합니까?

    -대답: , 그들은 신이기 때문입니다.

    -질문: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신들이 있습니까?

    -대답: , 물론입니다. 그 신들은 늘 싸웁니다. 

    -질문: 그렇다면 신들은 무엇이 진리이고 옳은지에 대해서도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대답: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그렇다면 때로는 신들도 틀릴 수 있습니까?

    -대답: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결론: 따라서 신들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지의 상황에서 이성적인 토론에 의해 논거를 검사하는 이 방법은 철학적 사고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방법은 경험에 근거를 둔 여러 전제들이 먼저 사실임을 밝힌 다음 그것에서 보편적 진리에 도달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최초로 사용된 귀납논증이었다. 이 영향력 있는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이후 프랜시스 베이컨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베이컨은 이 논증을 과학적 방법의 기점으로 사용했다. 그 결과 귀납논증은 서양철학의 기초 뿐만 아니라 모든 경험과학의 기초가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탐구정신에 대한 명성과 더불어 아테네에서 곧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누군가의 관점을 선택해 그 사람에게 단순히 질문을 던지면서 논거에서의 모순과 지식에서의 차이를 드러나게 한 다음 점차 통찰력을 이끌어내게 만들었다. 상대자에게 연달아 질문을 하면서 그가 지닌 사상과 가설을 알아낸 다음 그 안에 들어있는 모순을 밝혀내 새로운 결혼의 합의에 이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사고의 시작을 도와주는 그 과정을 그의 어머니의 산파술에 비유했다고 한다. 

    사랑이나 정의’, ‘충성심의 본질과 같은 주제의 토론으로 아테네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기 시작했던 소크라테스. 하지만 그것이 궤변의 위험한 방식이라거나 술책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그의 사명은 사람들을 가르치려는 것도 아니었고, 사람들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아내려는 것도 아니었으며, 바로 그들이 지닌 생각을 탐구하려는 데 있었을 뿐이었다. 소크라테스에게 통찰력을 제시한 것은 그가 이끌었던 대화법 그 자체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어로 아레테arete, 최고의 선이라는 뜻)’과 같은 개념들이 상대적이라는 생각에 반대했는데, 그런 개념들은 아테네 시민들이나 그리스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것이 세상 그 무엇보다 가장 귀중한 것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악을 행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고 확신했던 사람이었다.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양심에 반하는 행동으로 이에 불편함을 느낄 것이고, 우리는 모두 마음의 평화를 원하기 때문에 선뜻 악한 행동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하지만 그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전통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비난을 받았고, 젊은 아테네인들의 마음을 타락시켰으며 전통기반을 약화시킨 사상으로 젊은이들을 부패시켰다고 비난을 받았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아테네만 떠난다면 형벌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 유명한 악법도 법이다는 말과 함께 유죄평결을 받아들였고,(실은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기원전 399년에 독미나리로 만든 독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2022.05.22 - [philosophy/the ancient world] - ‘하늘은 도덕적인 질서의 원천’, ‘공자’(기원전 551~4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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