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숭아를 받으면, 자두로 갚는다’(묵자,기원전470~391년경)philosophy/the ancient world 2022. 5. 29. 18:10반응형
‘복숭아를 받으면, 자두로 갚는다’(묵자, 기원전 470~391년경)’(묵자,기원전470~391년경)
묵자(墨子)는 기원전 470년경(사실 묵자가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사상에 대해 제자들이 기록하여 남긴 《묵자》와 전후의 다른 사상가들이 말한 바에서 대략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기원전 470470년 경이라는 것은 그가 아마 공자 사망 전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사망 연도 또한 불분명한데 이 또한 맹자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이전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송나라(현재 허난 성 상구)에서 태어났다. 초기 전국 시대에 제자백가 중 묵가(춘추전국시대에 존재하였던 제자백가의 한 학파로, 묵자를 시조로 하며, 전국시대에 활약하다가, 진시황의 통일 이후 홀연히 사라졌다)를 대표하는 위인이다.
그가 왜 묵자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한 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송나라의 대부라는 설(송양공의 이복형인 공자 목이(公子目夷)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는데, 공자 목이의 이칭이 묵이(墨夷) 혹은 묵태(墨台)인데, 목이의 후손들이 그의 이름인 묵(墨)을 따서 묵 씨(墨氏)가 되었다는 설이다)과 고죽국(孤竹國) 왕족의 후손(고죽국의 국성이 자성(子姓) 묵태씨(墨胎氏)인데, 고죽국이 망한 이후에 후손들이 성씨를 묵태씨에서 글자 태(胎)를 때고, 묵씨(墨氏)로 호칭되었고, 묵자가 그 후손이라는 설이다)이라는 설이 있고, 오형 중 죄인의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묵형을 받은 인물이라 묵墨이라고 불렸다는 설도 있다. 혹은 피부가 검은 즉 노동자(하층민) 출신 또는 외국인(인도인 또는 아랍인)이라는 주장, 이외에 먹줄을 긋는 데 쓰는 도구를 묵이라 했으니 목수 등 장인이 아니었겠느냐는 설도 있다. 또는 묵가 학파 사람들이 검고 거친 옷을 입으며 강력한 규율을 가진 집단이었다는 일면에서 협사(俠士)나 멸망한 나라의 군인 출신이 아니냐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가 어떤 맥락으로 묵자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태어난 그가 중국의 고전에 기반을 둔 전통교육을 받았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묵자는 혈연관계, 군신관계를 중요시하는 유교에 반감을 품었다.( 묵자는 유가의 존비친소 尊卑親疎(공자의 사상. 분별적인 사랑을 말하는데 전혀 모르는 타인보다 이웃사람을, 이웃사람보다 내 가족을 사랑하라는 의미)에 기초한 사랑을 비판하면서, 다른 사람의 가족도 자신의 가족을 대하듯 하라고 주장하는 겸애를 주장하였다. 이 겸애는 유가에서 '아비도 몰라보는 집단'이라고 비난받는다. 묵자는 유교의 허례허식이 백성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판단하여 유교의 예를 맹렬히 비판하였다(유가의 삼년상의 비판을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예이다). 또한 공자를 포함한 사상가 대부분은 통치자가 백성을 이롭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묵자는 그런 사람들과 달리 통치자도 백성처럼 검소하게 생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관습 화한 예를 소모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묵자는 또한 유교가 귀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제사를 지내는 등 모순적인 교리를 가르친다고도 생각했다. 이와 반대로 그는 귀신 즉, 하느님의 존재를 믿었고, 그로 인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라는 겸애사상을 자신의 철학으로 정립하고, 그런 가르침을 펼쳐나갔던 것이다.
그는 ‘겸애’란 사람들이 지위나 서로의 관계에 상관없이 모두가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하느님을 믿었고, 그런 그의 믿음 하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베풀듯이 우리도 남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야 혼란한 사회가 안정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람을 대할 때는 구분 짓지 말고 모두를 함께 아울러서 아끼고 챙기자는 것이 바로 겸애의 기본 정신이었다. 그런 정신에 입각해 그는 묵가 사상으로 알려진 ‘모든 삶을 풍족하게 해 주고 지탱해주는’ 아가페적 사랑을 세상에 전파해 나갔다. 그는 겸애가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했고, 하느님은 만물을 공평하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가 생각하는 ‘겸애’란 ‘하느님의 사랑’이고, ‘아가페적 사랑’이었다.(반면 그가 보기에 유가의 사랑은 조건이 달린 사랑, 인간적 사랑, 에로스(eros)적 사랑이었다.) 능력에 한계가 있는 인간이 세상 전체를 사랑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는 결국 인간들이 모두 스스로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에게 있어 철학의 근원이란 근본적으로 자애로운 하늘의 도에 따르는 것이었을까?
그는 우리들의 행동에는 항상 박애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내게 복숭아를 주면, 그에게 자두로 갚는다”. 이것은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었다. 이 말은 자신이 대우받기를 바라는 대로 남을 대우하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대우함으로써 자신도 그 보답으로 그와 비슷한 대우를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편견 없이 사랑하라는 원칙을 통치자들이 실천한다면 갈등과 전쟁을 피할 수 있고, 또한 모든 사람들이 그 원칙을 실천한다면 더욱 조화롭고 건설적인 사회가 이루어지리라고 믿었다. 이러한 사상은 19세기 서양철학자들이 제시한 공리주의(utilitarianism)의 정신과 유사한 것이었다.
2022.05.22 - [philosophy/the ancient world] - ‘하늘은 도덕적인 질서의 원천’, ‘공자’(기원전 551~479년)
반응형'philosophy > the ancient worl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들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소크라테스, 기원전469~399년경) (0) 2022.06.10 ‘인간은 하나의 소우주’(데모크리토스,기원전460~371년경) (0) 2022.06.03 ‘만물의 척도는 인간’(프로타고라스, 기원전490~420) (0) 2022.05.27 ‘만물은 하나’(파르메니데스, 기원전 515~445년경) (0) 2022.05.26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35~475년경) (0) 2022.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