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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해는 감각에서 시작된다(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384~322년)’philosophy/the ancient world 2022. 6. 14. 15:50반응형
‘모든 이해는 감각에서 시작된다(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384~322년)’
스승 플라톤과 함께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추앙받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오늘날의 그리스 북동지역에 위치한 칼키디케(Chalcidice)반도의 작은 도시 스타기라(stagira)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2세의 시의(侍醫)였던 부친 니코마코스와 그리스 에비아 섬 서부 연안에 위치한 도시 할키스 출신의 모친 파이스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덕분에 왕자 필리포스 2세의 소꿉동무로 궁정에서 자랐으며, 어린시절부터 일찌감치 귀족계급의 일원으로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려서 양친을 여읜 뒤 그는 연고자인 프록세노스의 피후견인으로 자라나게 된다.
그와 플라톤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의 나이 17세 때, 플라톤의 나이 60세 때 이루어졌다. 그가 직접 아테네로 가 플라톤이 설립한 아카데미에서 수학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후 그곳에서 20년 동안 학생과 교사로 지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그의 스승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 공부의 과정 중에서 그는 스승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스승의 가장 중요한 이론 중 하나인 이데아론(형상이론)을 거부했다. 스승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현실세계의 모형에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형상’이라는 이데아가 초현실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보편적 특성’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이데아이고, 선험적으로 이데아에 대한 선지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플라톤은 영혼은 불사불멸의 존재이고, 우리들의 영혼은 그 초현실 세계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그를 통해 그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인 세상의 물질들을 분별해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일상의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실체를 굳이 이데아라는 초현실적인 공간에서 끌어올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예를 들어 보면 이런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에게 ‘개(dog)’의 보편적 특성에 해당하는 이데아에 대한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그 기억을 통해 우리들이 셰파트를 보거나 치와와를 보면 그들을 개라고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개들의 공통된 특성을 인식하고, 그렇게 우리는 우리 주변 세상에서 얻은 증거로부터 개라는 ‘분류’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플라톤은 ‘관념’이 먼저라고 생각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관념에 우선하여 인간의 감각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그가 그런 경험론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에 비해 플라톤의 배경에는 확고하게 수학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이 배경 차이가 아마도 두 사람의 접근방식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수학, 특히 기하학은 일상세계와 전혀 다른 추상적인 개념을 다루지만 생물학은 우리 주변의 세계와 매우 흡사하고 거의 관찰에만 기반을 둔다. 플라톤은 (자연에서 존재할 수 없는) 완전한 원과 같은 개념에서 형상이라는 영역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계를 관찰함으로써 어떤 변하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음을 알아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플라톤의 이론을 근본적으로 뒤엎었다. 인간의 감각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를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그는 자연계를 연구하여 특정 동식물의 각 표본의 특성을 관찰해 다른 동식물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체계를 세우고, 무엇 때문에 그런 특성을 지녔는지에 대해 추론했다. 그런 그의 독자적인 연구는 우리가 형상을 인식하기 위해 어떤 선천적인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플라톤의 주장이 틀렸다는 자신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해주는 것이었다.
스승 플라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분명 어떤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는 ‘제3인간 논증(third man argument, 플라톤의 유명한 이데아론에 대한 비판론 중 하나로, 그의 대화편 중 파르메니데스 편에서 이데아론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반박을 다루면서 처음으로 이 논증의 원형이 나타났다. 그 이후 이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책, 형이상학에서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접했던 이 논증을 변형하여 주장했다. 이후 이것은 이데아론에 대한 오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이라는 것을 통해 그 역시 자신의 이데아론의 모순점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논증은 이런 것이다. 만약 어떤 인간이 ‘인간의 이데아’에 대응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그 인간과 ‘인간의 이데아’ 둘 다를 모두 포함하는 ‘제3의 인간 이데아’가 존재해야 한다. 개별적인 그림자와 이데아가 결합한 것 역시 이데아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데아는 선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인가? 이데아와 그림자가 결합하는 순간 새로운 이데아가 만들어 진다는 것인가? 만약 그렇게 되면 이런 순환논법은 끝도 없이 이어져 무한히 많은 이데아가 생겨나야 한다. 이데아는 인과를 초월하고, 가역적으로도 그 존재를 증명받는다는 말인가?
플라톤은 아마도 파르메니데스의 반박을 이데아란 인간의 이해 한계 너머에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삽입했을 것이라 여겨지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플라톤의 이론이 틀렸다는 증거로 여겼다. 아테네를 떠나 이오니아로 옮겨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곳에서 그 지역의 야생동물을 연구하는 데 수년을 보냈고, 그런 경험이 그의 그런 의문을 보다 더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기원전 335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권유로 아테네로 돌아와 플라톤의 아카데미에 필적할 만한 리케이온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그곳에서 그는 거의 저술 활동에 전념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아테네에서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반감이 급속히 일어났고, 그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비아(Euboea)섬의 할키스(Chalcis) 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2022.06.12 - [philosophy/the ancient world]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형상의 그림자다(플라톤,기원전427~347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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