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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시간을 초월한다’(보이티우스, 서기480~525년경)philosophy/the medieval world 2022. 7. 11. 15:59반응형
‘신은 시간을 초월한다’(보이티우스, 서기480~525년경)
‘최후의 로마인이자, 최초의 스콜라 철학자’라고 불리우는 중세의 기독교 철학자 아니키우스 보이티우스(Anicius Boethius)는 로마제국이 쇠퇴하고 동고트족(Ostrogoths)이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때 때어난, 기독교를 믿는 로마 귀족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른 나이인 일곱 살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고, 이후 로마의 귀족 집안인 심마쿠스 집안에 의해 돌봄을 받았다.
부모와 마찬가지로 역시나 귀족 집안인 심마쿠스의 밑에서 자란 덕에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아니키우스 보이티우스는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았고, 그리스와 라틴 문학, 철학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익힐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자질 덕분인지 25세의 어린 나이에 아니키우스 보이티우스는 원로원 위원이 될 수 있었고, 이후 동고트 왕인 테오도리쿠스(Theoderic) 밑에서 그의 주요 고문관 역할을 맡을 때까지 그리스의 원전을 번역하고 해석하는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참조:https://sikguy.tistory.com/15)의 논리학에 관한 저서들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데 몰두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교파가 다름에도 그를 중용한 은인 테오도리쿠스에 의해 왕실 고문관 역할을 맡게 된 약 5년 뒤 그를 임명했던 바로 그의 손에 의해 아니키우스 보이티우스는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왕실 모함의 희생자가 되어 부당하게 반역죄를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테오도리쿠스는 말년에 복잡한 정치상황 때문에 상당히 예민해지고 의심병이 심해졌는데 그로 인해 어이없게도 부당한 누명을 쓴 부하들을 처형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 아니키우스 보이티우스 역시 바로 이때 희생된 것이다. 아니키우스 보이티우스는 뛰어난 외교관으로서 테오도리쿠스의 신임을 받았지만 동로마와 내통했다는 역모죄에 연루된 전직 집정관 알비누스(Albinus)를 변호하다가 그 자신도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아 감옥에 갇힌 것이었고, 곧바로 처형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니키우스 보이티우스는 처형당하기 전 감옥에서 선고를 기다리면서도 펜을 놓지 않았고, 그의 가장 유명한 명작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을 저술했다고 한다.
전통 플라톤주의(참조:https://sikguy.tistory.com/14)철학에 관해 교육을 받았으며, 또한 기독교도였던 아니키우스 보이티우스는 ‘신이 우리가 미래에 무엇을 할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유의지를 지녔다고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에 답안을 내놓은 철학자로 유명하다.
아니키우스 보이티우스의 판단에 의하면 신은 무소부재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 말은 즉, 신은 현재를 잘 아는 것처럼 미래를 잘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인식자’의 ‘본질’에 관해 사색하다 보면 문제가 생겨난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 살기 때문에 오직 과거(사건이 이미 일어난 경우), 현재(사건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경우), 미래(사건이 일어날 경우)의 ‘순서’로 사건을 인식할 수 있다. 좀 더 좁혀서 말하면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의 사건에 대한 결과를 알 수 없다. 그리고 미래가 불확실한 이유에는 우리의 ‘자유의지’가 그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신이 ‘영원한 현재’를 산다면 신은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신은 영원한 현재에 살고 있으며, 또한 신은 우리가 현재를 알고 있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가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다. 아니키우스 보이티우스가 내놓은 해답은 이렇듯 순간을 살 수 밖에 없는 인간과 영원한 현재로 사는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와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상충지점을 논리적으로 풀어낸 것이었다.
사실 그 딜레마는 오랫동안 사람들을 괴롭혀온 딜레마였다. 예를 들어 보자. 당신이 오늘 오후에 남자친구를 만나거나 요리를 하는 데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결과적으로, 당신은 당신의 ‘자유의지’로 남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그것을 영원한 현재로 살아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모든 것을 아는 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신’은 ‘현재적’으로 당신이 이미 남자친구를 만나러 갈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결정론’인 그 사실이 당신의 입장에서 어떻게 ‘자유의지’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신이 이미 당신의 미래를 결정해 놓고, 당신은 그에 꼭두각시처럼 따른 결과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지 않을까?
아니키우스 보이티우스는 이 문제에 대해 ‘신이 (우리의 미래를) 알고는 있지만’, ‘(우리의 자유의지에) 관여하지는 않는다’는 논리로 해결을 해 나간다. 궤변같지만 이런 논리라면 일견 상충하는 것같은 두 가지 상황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뀌어지게 된다. 당신이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것을 당신에게 들어 알고 있는 친구가 있다고 치자. ‘그저 알고만 있을 뿐인’ 그 친구가 당신의 자유를 멈추도록 방해하지 않는 것처럼, 신 역시 우리의 미래 행동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미래에 일어날 우리의 자유행동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신이라는 인식자와 나라는 인식자에게 있어 모순되는 논리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신이 왜 관여하지 않는가? 바라보기만 하고 알고 있기만 한 신을 진짜 신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때문에 오늘 날의 몇몇 사상가들은 이런 해답을 거부하면서 나는 오늘 남자친구를 만날지 요리를 할 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으므로, 모든 것을 아는 신조차 내가 남자친구를 만나러 갈 지 요리를 할 지는 알지 못하고 또한 알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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