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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모든 이해를 넘어선다,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서기 1401~1464년)
    philosophy/the medieval world 2022. 8. 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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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 모든 이해를 넘어선다,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서기 1401~1464)

    nikolaus von kues(AD1401~1464)
    nikolaus von kues(AD1401~1464)

    최초로 우주의 무한을 떠올린 것으로 유명한 철학자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Nikolaus von Kues) 1401년에 독일의 서남부 소도시 쿠에스(Kues)에서 태어났다. 귀족 가문이 아닌 일반 평민 가정 출신이었던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는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유년 시절 아버지와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그가 12살이 되던 해에 어떤 이유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와 심한 말다툼을 했고, 강물에 버려지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에 앙심을 품고 이른 나이에 집을 나온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는 사냥꾼들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어 이후 형제단 계통의 교파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는 이후 열 다섯 무렵부터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이후 그곳에서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미 30여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였던 하이델베르그 대학교는 당시 유행하던 이른바 보편자 논쟁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던 학교였다고 한다. 플라톤(참조:https://sikguy.tistory.com/14)의 이데아론에 등장하는 보편자를 수용하는 입장이 아니라 그와 대립하는 입장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참조:https://sikguy.tistory.com/15)의 견해를 수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편자 논쟁에서 보편자를 지지하는 측의 입장은 낱낱의 개별적 자아 혹은 개체보다 유와 종에 해당하는 보편자가 더 중요하고, 우월한 실재성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인간’이란 보편개념 개별적인 인간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보편자를 수용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실상은 이데아 즉, 보편자이고, 각각의 자신, 개체는 그 보편자로 인해 탄생한 그림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은 이 지상에 최초의 인간 존재가 살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고, 신의 이념으로서 신 안에 이미 영원히 실재하고 있었다.

    이런 이념에 따르면 모든 낱낱의 인간들은 그들 안에 보편자가 표현되고 있는 만큼에 한해서만 실재적’이다. 이들에게 있어 한 사람을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인격으로 만드는 것, 곧 개성이라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그밖의 다른 모든 보편개념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 자체는 어떤 한 사람이 병든 이웃을 돕는, 구체적 선한 행위보다 더 우월하다. 또한 여성성(Das Weibliche)’은 한 여배우가 지닌 개별적인 여성적인 특징보다 더 풍부한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

    니콜라우스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이와는 반대되는 견해들과 마주치게 된다. 교수들은 철저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즉, 유명론唯名論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들은 보편자란 현실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도, ‘선’도, ‘여성’도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따르면 보편자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낱낱의 것들만이 현실적(실재적)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보편적 실재가 아니라 다수의 개별 인간들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인간 무리를 두고 인간’이란 집합명사를 만들어 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란 우리들의 지성이 고안해 낸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인간’은 이 지상에 인간들이 살기 이전에’가 아니라 살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존재한다. 따라서 보편개념들은 더 우월한 실재성은 말할 것도 없고, 도무지 그 어떤 실재성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는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수들을 통해 그런 이론을 접하게 된 뒤 충격에 빠졌고, 논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교수들과의 갈등을 겪은 이후 결국 하이델베르그 대학을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파두아(Padua)대학으로 떠나게 된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는 신학부에 등록한 뒤 그곳에서 교회법과 기하학등을 배우게 된다. 

    6년 후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한 니콜라우스는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업을 개업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첫 번째 소송-유산분쟁에 관한 소송-에서 패소하는 불운을 당했고, 여기에 화가 난 그는 변호사 일을 포기하고, 쾰른으로 떠나 그곳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1430 29세의 나이에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는 신부 서품을 받게 된다. 그때 그는 성직자로 성공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이후 정말로 그는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가 되어 일생동안 로마 교회의 개혁에 헌신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재결합을 위해서도 노력했던 그는 1448년에 추기경이 되었고 1464년에 움부리아 토디(Todi, Umbria)에서 사망했다.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는 5세기 중반 종교개혁 직전 가장 뛰어난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고, 신학자인 동시에 과학자 및 수학자이기도 했다. 동시에 신비사상가 곧 탁월한 영성가이기도 했다. 우리 나라의 세종대왕의 치세기간에 해당하는 그의 주요 활동 기간 동안 그가 남긴 저서들은 대부분 영성에 관계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성과 영성을 종합하는 대표적 사상가였고, 신은 그야말로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신의 본질을 설명하려고 하는 중세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폰 쿠에스의 사상은 우리가 사물을 정의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여 지식을 얻는다는 관점에서 시작된다. 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신의 기본적인 본질을 정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플라톤은 이나 절대자를 지식과 다른 모든 형태의 궁극적인 원천이라고 설명했고, 일부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신을 초월자라고 언급했다. 서기 1440년경에 저술 활동을 한 폰 쿠에스는 더 나아가 신은 모든 것이 생기기 이전, 어쩌면 어떤 것이 존재할 가능성조차 있기도 전에 나타난 존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면, 어떤 현상이 존재할 가능성이란 것은 그 현상이 실제로 존재하기 전에 있어야 한다. 어떤 존재가 생겨날 가능성에 앞서 그 존재가 실제로 생기는 일은 불가능하다. 폰 쿠에스는 어떤 것이 존재할 가능성이 생기기 전에 나타는 존재는 절대자(Not-other)’라고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절대자는 그 모든 이해를 넘어선 것이고, ‘모든 존재들은 절대자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를 통해 존재한다는 식으로 모든 존재들을 앞서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알든지 그것은 신이 아니며, 무엇을 상상하든지 신과 같은 것이 아니다.” 바로 그것이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가 생각한 신의 개념이었다. 

     

    2022.06.12 - [philosophy/the ancient world]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형상의 그림자다(플라톤,기원전427~347년경)’

    2022.06.14 - [philosophy/the ancient world] - ‘모든 이해는 감각에서 시작된다(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384~3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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