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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이란 그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될 준비가 되어있을 때 생겨난다,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서기1466~1536년)
    philosophy/the medieval world 2022. 8. 13.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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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이란 그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될 준비가 되어있을 때 생겨난다,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서기1466~1536)

    Desiderius Erasmus,AD1466~1536
    Desiderius Erasmus,AD1466~1536

    가장 행복한 삶은 아무것도 모르는 삶이다.”-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우신예찬으로 유명한 철학자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는 1466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성직자였던 아버지 로헤 헤라트(Roger Gerard)와 외과의사의 딸이었던 어머니 마하레트(Margaret)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라스뮈스가 출생했을 당시 아버지 로헤 헤라트와 어머니 마하레트는 결혼을 한 상태가 아니었다. 로헤 헤라트와 마하레트는 약혼만 한 상태였다. 때문에 그의 출생은 혼외 출산이었다. , 사생아로 그는 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었다. 

    1살에서 4살까지 로테르담에서 유아기를 보낸 에라스뮈스는 4살에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그곳을 떠나게 된다. 이후 9살 때 에라스뮈스는 아버지에 의해 라틴어 학교에 보내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라틴어 시를 지을 만큼 높은 학문적 재능을 보였다. 

    17살이 되던 1483,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는 어마어마한 불행을 맞게 된다. 흑사병으로 아버지 로헤 헤라트와 어머니 마하레트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황망 중에 부모를 잃고 난 후, 그는 어느 후견인의 손에 맡겨졌고, 후견인은 다시 그를 '공동생활 형제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맡기게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동료 수사를 만나기도 했지만 당시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과 혹독한 생활때문에 어마어마한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그는 수도원의 타락과 부정 축재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우는 한편 신과의 개인적인 만남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점차 키워 나가게 된다.

    21살이 되던 해 에라스뮈스는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에 입회한다. 입회 이유는 가난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쩔 수 없는 사정때문에 입회한 뒤 결국 가톨릭 사제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수도원 생활에 염증과 회의를 느꼈다. 그는 호시탐탐 그런 생활을 벗어날 방도를 찾았고, 그런 그에게 곧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뛰어난 라틴어 실력을 눈여겨 본 캉브레(Cambrai) 지역 베르겐 주교가 그에게 자신의 비서직을 제안했던 것이다. 기뻐하며 다시 수도원을 떠난 그는 1493년 정식으로 베르겐 주교의 비서가 되었다. 베르겐 주교의 밑에 있는 동안 에라스뮈스는 수도원의 지루한 삶에서 벗어나 세속적 삶을 즐길 수 있었다. 베르겐 주교는 또한 그가 프랑스 파리에 가서 공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덕분에 에라스뮈스는 파리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며 당시의 지식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1499, 에라스뮈스는 영국을 방문한다. 영국 방문은 그가 인문주의자의 길을 걷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영국에서 토머스 모어, 존 콜렛 등 당시의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했고, 어린 시절의 헨리 8세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영국에서의 지적인 교류를 계기로 고전과 인문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1506년 그리스어와 인문주의를 더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탈리아로 넘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그리스인들에게 직접 그리스어를 배웠다. 그리고 1509년에 다시 영국으로 넘어간 에라스뮈스는 토머스 모어의 집에 머무르면서 작품을 썼다. 그 작품이 바로 교회의 허위와 위선을 풍자한 『우신예찬』이었다. 우신예찬에서 그는 우신(愚神, 바보 신)을 내세워 교황, 성직자 뿐만 아니라 군주와 학자들을 비판했는데, 이 때문에 『우신예찬』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이 저서의 파급력은 엄청났고,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가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게 되었다.

     

    "아마도 신학자들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지나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거만하고 화를 잘 내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600개에 달하는 논거를 한 조()로 묶어 내 주장을 취소하도록 몰아세울 것이다. 내가 그것을 거절하면 그들은 즉각 나를 이단자로 선언할 것이다. 스콜라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방법은 난해한 것들 가운데 가장 난해한 것을 더욱 난해하게 만들 뿐이다."-우신예찬 중-

     

    그가 이전에 저술했던 『격언집(Adagia), 『기독교도 병사의 휴대서』 등에도 이러한 인문주의적 태도가 담겨져 있는데, 그는 가톨릭과 인문주의의 융합에도 관심을 가져 인문주의의 문헌적 연구를 통해 성서의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고자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에라스뮈스는 1516년 신약성서의 각종 그리스어 원전 사본을 합쳐 사상 처음으로 그리스어 성서를 활자화하고 상세한 주해와 라틴어 번역을 첨가한 『교정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펴냈다. 이 업적은 신학자로서 그의 명성을 높여주었으며, 여태껏 교회가 독점했던 성서 해석을 바로잡았기 때문에 이후 종교개혁의 밑바탕이 되었다. 루터의 그 유명한 독일어 번역 성경이 바로 에라스뮈스의 라틴어판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는 여러 책을 통해서 당대 부패한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여 많은 종교개혁가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대한 박식함으로 유럽 최고의 지성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가 벌어지고 종교개혁가들이 투쟁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하자 그는 가톨릭에 변화가 필요한 것은 맞으나 전쟁은 원하지 않는다는 평화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이로 인해 에라스뮈스는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에게 외면당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노년을 보내게 되었다.

    그가 선종한 것은 1536, 네덜란드의 섭정인 헝가리의 메리 여왕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브라반트로 가던 도중이었다. 스위스 바젤에서 이질 증상으로 사경을 헤매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신이시여..."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선종 뒤에도 그는 끝내 로마 가톨릭교회의 병자성사를 받지 못했다. 그의 시신은 바젤 성당에 안치되었고, 1622년에는 그가 태어난 로테르담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에라스뮈스는 르네상스시대 초기 유럽 전역에 밀려들기 시작해 종교 개혁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문주의사상을 반영하는 학자였다. 그가 저술한 [우신예찬 In Praise of Folly]은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교리적 갈등을 재치 있게 풍자하고 있으며, 성찰을 요구하는 진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에라스뮈스는 이 책에서 지극한 행복 믿음에 대한 그의 생각을 진술하고 있다. 그가 이 책에 밝힌 바에 의하면 순진한 무지라고 그가 정의한 어리석은 행동이 인간의 어떤 본질적인 부분이며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최대의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반면 지식은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으며 골치 아픈 삶을 만들어낼 복잡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그는 덧붙여 주장했다. 

    에라스뮈스의 주장에 따르면, 진정한 믿음은 결코 이성이 아닌 오직 신앙에만 근거를 둘 수 있다는 점에서 종교는 또한 어리석음의 한 형태다. 그는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중세 철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의 합리주의와 기독교 신학을 혼합한 것을 종교 부패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면서 개개인이 가톨릭 교리로 규정된 존재가 아니라 신과 직접적인 관계에서 진심으로 우러나는 신앙 생활로 돌아가기를 주장했다. 

    에라스뮈스는 자신이 성서의 진정한 정신으로 여기는 것, 즉 소박함, 겸손함, 순진함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것을 조언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정신이야 말로 바로 행복한 삶의 핵심을 지닌 근본적인 인간의 속성이다. 

     

     

    2022.08.04 - [philosophy/the medieval world] - 신은 세상을 영원히 존재한 것처럼 창조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서기 1225~1274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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