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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는 도덕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서기1469~1527년)philosophy/the medieval world 2022. 8. 21. 17:39반응형
군주는 도덕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서기1469~1527년)
‘군주론The Prince’으로 유명한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가 태어난 것은 1469년 5월 3일,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였다.아버지 베르나르도와 어머니 바르톨로메아의 2남 2녀중 셋째로 태어난 그의 28살 이전의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조상들이 사업에 재간이 있어 은행업과 양모업 등으로 제법 많은 재산을 비축했었다는 것과, 아버지 베르나르도는 학자 스타일의 법률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재산을 불리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 마키아벨리도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고대 철학과 역사와 시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 등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일기에서 몇 차례 모호하게 언급된 것과 1497년에 쓰인 마키아벨리의 글을 보면 그가 훌륭한 교육을 받았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사료들에 따르면 그는 12살에 파올로 다 론시글리오네의 학교를 다녔고, 20대 초중반에는 피렌체의 대학교인 스투디오(Studio)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1498년, 29살의 마키아벨리는 피렌체공화국의 정치인 겸 외교관이 되었다. 피렌체 공화정의 외교 실무를 담당하는 제2서기장에 발탁된 것이다. 공식적인 직함은 '10인 전쟁위원회의 비서관'이었는데, 임무는 공화국의 군대를 감독하는 기관의 통신문을 처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비록 중요한 정책 수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는 없는 직책이었지만, 정책을 집행하고 상관을 보좌하는 과정, 그리고 정보를 취합하고 요약하여 전달하는 과정에서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의 외교정책들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여러 대사들이 급하게 보내온 공문서들을 처리하면서 그 본질을 파악하려고 항상 노력했고, 그 때문에 상관들은 그가 보낸 공문서를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마키아벨리 역시 자신의 그런 일들을 즐겼다고 한다.
1512년 메디치가가 피렌체에 돌아왔을 때 공직에서 해임된 이후 그는 각종 저작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정계로 복귀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는 메디치가의 신임을 다시 얻어,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에게서 피렌체 역사 집필을 의뢰받았다. 그 책은 추기경이 교황 클레멘트 7세가 된 후인 1525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1527년 마키아벨리는 공직생활로 복귀하고 싶다는 야망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권력에 대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관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정치적 관심사를 둘러싼 배경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격변이 좀처럼 끊이지 않던 시기에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Florence)에서 태어났다. 메디치가가 피렌체를 약 35년간 비공식적으로 지배하던 시기였다.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해에는 로렌초 데 메디치(일명 ‘위대한 로렌초’)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치자가 되면서, 피렌체의 눈부신 예술 전성기를 예고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서기 1492년 로렌초의 자리를 물려받은 아들 피에로(Piero, 일명 ‘불운한 피에로’)가 권력을 잡은 후 1494년 샤를 8세 치하의 프랑스가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쳐들어 오자 피에로는 항복을 선언하고는 시민들의 반발에 떠밀려 도시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해 피렌체는 공화국으로 선포되었다.
그후 도미니크회 성 마르코 수도원장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가 피렌체의 정계를 장악했다. 이 도시국가는 그의 지도 아래 민주주의 시기로 접어들었지만, 사보나롤라는 교황의 타락을 비난한 후 이단자로 몰려 화형 당했다. 이를 계기로 처음 피렌체 정계에 발을 들인 마키아벨리는 1498년 제2장관직에 올랐다.
서기 1494년 샤를 8세의 침공이 도화선이 되어 이탈리아 역사에는 격변기가 도래했는데, 당시 이탈리아는 교황, 나폴리,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이 다섯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사실상 이 나라는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등 여러 외세의 각다귀판이었다. 그들의 군대 앞에서 피렌체는 연약한 존재였고, 마키아벨리는 14년간 외교사절로 여러 도시를 오가며 고군분투하는 공화국을 떠받치려고 애썼다.
외교 업무를 수행하던 중 마키아벨리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서자 체사레 보르자를 만났다. 교황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인물로, 피렌체에도 무척 위협적인 존재였다. 비록 체사레가 피렌체의 적이긴 했지만,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체사레의 강인하고 총명하며 유능한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1503년 교황 알렉산데로 6세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은 율리오 2세 또한 강건하고 유능한 인물로, 군대를 부리는 수완과 교활한 책략 모두에서 마키아벨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교황 간의 갈들이 심화됨에 따라 피렌체는 프랑스와 함께 교황과 그의 동맹국 스페인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가 패전했고 피렌체도 운명을 같이했다. 1512년 스페인이 피렌체 정부를 해체하고 메디치가를 복귀시키면서, 사실상 메디치 추기경의 독재체제가 자리잡았다.
마키아벨리는 행정직에서 해임된 후 피렌체의 농장으로 추방당했다. 메디치가의 지배 하에서 그는 정치경력을 되살릴 수도 있었으나, 1513년 2월 메디치가를 노린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고문당하고 벌금을 문 후 투옥되었다. 마키아벨리는 한 달도 채 안 되어 석방되었지만 그가 재임용될 가능성은 희박했고, 새로운 정치적 지위를 찾으려던 그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그는 피렌체 메디치가의 우두머리인 줄리아노(Giuliano)에게 책을 한 권 헌정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책을 다 썼을 무렵 줄리아노가 죽는 바람에 마키아벨리는 줄리아노의 후계자인 로렌초로 헌정대상을 바꾸었다. 책은 당시 유행하던 종류로, 군주에게 해주는 조언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작성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The Prince]은 재치 있으면서도 냉소적인 책으로, 넓게는 이탈리아, 좁게는 피렌체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보여주고 있는 책이었다. [군주론]은 기독교윤리를 단호히 배제한다는 점에서 같은 종류의 다른 책들과 뚜렷이 구별되었다.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가 제시하는 주장에 따르면, 통치자의 목적은 그것을 이루는 데 쓰는 수단을 정당화한다. 마키아벨리는 냉정한 실용적 조언을 군주에게 해주고 싶었는데, 크게 성공한 교황과 추기경을 접해본 바 기독교 가치관은 방해가 된다면 과감히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접근법은 비르투(virtu)라는 개념에 중점을 두었다. 이는 현대의 윤리적 덕(virtue) 개념과 다르다. 비르투는 식물이나 광물의 치유력 같은 사물의 힘이나 기능을 뜻하는 중세의 덕 개념에 더 가깝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덕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덕은 곧 통치와 관련된 힘과 기능이었다. 또 비르투의 라틴어 어원은 남자다움과도 연관되어있다(‘virile’도 그러하듯). 이런 뜻은 마키아벨리가 비르투를 군주와 나라 모두에 적용해 이야기하는 내용에서 드러난다. 그런 경우 때로는 비르투가 ‘성공’이라는 뜻으로, 동경하고 본받아야 할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요지의 일부는 통치자란 도덕에 얽매여서는 안 되며, 자신의 영광과 국가의 성공을 얻는데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접근법은 나중에 현실주의로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모든 경우에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현명한 군주라면 피해야 할 수단도 있다. 그런 수단은 설령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군주를 미래의 위험에 노출시킨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군주가 삼가야 할 수단 중 하나는 국민이 군주를 증오하도록 만드는 수단이었다. 군주는 사랑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마키아벨리는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국민이 군주를 증오하게까지 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반란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국민을 불필요하게 학대하는 군주도 안되었다. 군주는 자비롭다는 평판을 얻어야지, 잔인하다는 평판을 얻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전반적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몇몇을 가혹하게 처벌해야 할 때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결국 그렇게 해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울 때 뿐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마키아벨리가 확신하는 경우라도 이 원칙은 오로지 군주에게만 적용된다. 국민의 올바른 행실과 군주의 올바른 행실은 별개다. 하지만 일반 국민과 관련해서도 마키아벨리는 종래의 기독교윤리를 강력한 국가와 맞지 않게 무력하다며 무시해버릴 때가 많았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군주론]이 과연 마키아벨리 본인의 견해를 나타내고 있는 책인지를 의심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근거가 있다.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그 책에 담긴 생각과 그의 다른 주요 저서인 [로마사 논고 Discourses on the Ten Books of Titus Livy]에 표현된 생각이 다르다는 점이다. [로마사 논고]에서 마키아벨리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공화제야말로 이상적인 체제이고, 적절한 정도의 평등이 이미 존재하거나 앞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경우라면 공화제가 도입되어야 마땅하다. 군주제는 평등이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앞으로 실현될 가망도 없는 경우에만 적절하다.
하지만 어쨌든 바로 그런 경우에 통치자가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솔직한 생각이 [군주론]에 나타나 있다고 볼 수는 있다. 군주의 권력이 필요악인 경우가 있다면, 그 권력은 최대한 잘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피렌체가 그런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으며 강력한 통치자가 그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쓴 이유가 메디치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는 점은 그 책의 내용을 조심해서 다뤄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된다. 그는 [로마사 논고]를 피렌체 공화정부의 구성원들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책을 헌정 받는 사람이 읽고 싶어 하던 내용을 썼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군주론]에는 용병에 의존하지 말고 시민군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비롯해 마키아벨리가 진심으로 믿었을 법한 내용이 꽤 많이 들어있다. 문제는 어느 부분이 진짜 그의 생각이고 어느 부분이 그의 생각이 아닌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마키아벨리가 풍자를 의도했고 실제 예상독자 또한 공화주의자들이지 지배층 엘리트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이 견해는 마키아벨리가 그 책을 엘리트의 언어인 라틴어로 쓰지 않고 민중의 언어인 이탈리아어로 썼다는 사실이 뒷받침한다. 실제로 [군주론]은 마치 독자가 이렇게 결론지을 것처럼 풍자적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게 훌륭한 군주가 처신해야 할 방식이라면,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군주에게 지배당하지 않도록 해야겠군!” 만약 마키아벨리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생각마저 풍자하고 있었다면, 이 그럴싸하게 소박한 책의 취지는 사람들이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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