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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이라는 함정,미셸 드 몽테뉴(서기1533~1592년)philosophy/the medieval world 2022. 8. 30. 14:02반응형
영광이라는 함정,미셸 드 몽테뉴(서기1533~1592년)
[수상록]으로 유명한 미셸 에켐 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는1533년 2월 28일, 보르도 시장인 아버지 피에르 몽테뉴와 유대인 혈통의 어머니 앙투아네트 드 루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몽테뉴 집안은 보르도 근처의 대저택에서 거주하고 있었고, 인근에서도 알아주는 부유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런 집안에서 몽테뉴는 유력 가문의 아들, 그것도 장남으로 태어난 것이다.
몽테뉴가가 유력가가 된 것은 훈제 생선과 포도주를 팔던 무역상이었던 몽테뉴의 증조부가 부유한 상속녀와 혼인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렇게 몽테뉴 성을 사들인 후 부유함을 얻게 된 몽테뉴 가문은, 이후 아버지 피에르가 군인의 신분으로 프랑수아 1세와 함께 이탈리아 원정을 다녀오게 되면서 귀족 칭호까지 얻게 된다.
몽테뉴의 아버지 피에르의 이후 행적은 그를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보르도의 배석판사가 된 것을 시작으로 부시장을 거쳐 시장으로까지 선출되었던 아버지 피에르는 몽테뉴를 낳고 나자 이제는 아들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지위에 있었던 만큼 자기만의 신념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아들 몽테뉴에 대한 교육 철학 역시 남달랐던 것이다.
장남을 반드시 자신의 후계자로 키울 생각을 한 아버지 피에르는 몽테뉴가 태어나자마자, 그를 몽테뉴 성에서 멀리 떨어진 촌락의 가난한 벌목꾼에게 2년간 양육을 맡기는 선택을 한다.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들에게 평범한 노동자의 삶을 직접 체험해 보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몽테뉴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유년기를 평범한 노동자의 자식처럼 살아가게 되었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몽테뉴는 모든 교육을 집안에서 받게 되었다. 상당한 비용을 들어 라틴어 가정교습을 받았고, 아버지 피에르는 자신의 성에서 라틴어 이외의 다른 말로는 몽테뉴와 얘기를 하지 못하게 명령했다. 덕분에 몽테뉴는 불과 6살만에 프랑스 단어는 하나도 모른채 라틴어를 깨우쳤다. 그에게 프랑스어는 사실상 제2의 언어였다.
이후 6살부터 13살까지 보르도의 학교에 들어가 스콜라학자들에게 엄격한 주입식 수업을 받은 몽테뉴는 2년간의 공백기를 가지다가 15살 무렵 대학교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했다.
그 뒤 21살부터 3년간 몽테뉴는 페리괴 조세 재판소 법관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24살에는 보르도 고등법원 법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여기서 평생의 친구 라 보에시와 만나게 된다. 당시 가혹한 정치를 거리낌 없이 비난하는 라 보에시에게 몽테뉴는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몽테뉴가 30살이 되던 해에 라 보에시가 페스트에 걸려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35살이 되던 해에는 아버지 피에르까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불과1년 뒤에는 몽테뉴의 남동생 아르노가 테니스 공에 머리를 맞고 뇌출혈로 사망했다. 또한 몽테뉴 본인도 낙마 사고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한 충격으로 몽테뉴는 1570년 37살의 이른 나이에 법관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유산으로 물려받은 몽테뉴 성의 탑 건물을 서재로 꾸민 다음 그곳에 라 보에시에게서 받은 책과 자신의 책 1000권을 정리해 넣었다. 그리고 벽면 곳곳에는 54개의 라틴어 격언을 새겨넣었는데 그곳의 맨 마지막에 는 이런 프랑스말을 적어 넣었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그 성에 은거하면서 몽테뉴는 글쓰기에 몰두했다. 지금의 우리들에게 그는 ‘위대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시절 몽테뉴에게 있어 글쓰기란 어떤 철학적 체계를 세우려는 작업이 아니었다. 그저 '나 자신을 연구'하는 일이었다. 여느 고상한 철학자들처럼 자신을 뽐내기 위해 자신을 탐색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는 자신을 탐색했다. 그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자신의 물음을 결코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명령문으로 바꾸지 않았다. 그는 경직된 주장을 하는 대신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한 수많은 시도들을 즐겼을 뿐이었다. 몽테뉴의 사색은 1580년에 끝이 났고, 그 결실로 그 유명한 ‘수상록’의 초판이 발간되었다.
“군중 속의 전염은 매우 위험하다. 당신은 포악한 자들을 따라하거나 증오하거나 둘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미셸 드 몽테뉴
[수상록] 제 1권에 실린 수필 <고독에 대하여>에서 미셸 드 몽테뉴는 예로부터 인기 있던 주제, 즉 사회적 삶의 지적, 도덕적 위험과 고독의 가치를 다루었다. 그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몽테뉴가 중요시했던 것은 육체적 고독이 아니라 군중의 행동과 의견을 무조건 따르고 싶은 충동을 물리치는 능력의 계발이었다.
그는 우리가 동료 인간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모습을 우리가 물질적 부와 재산에 집착하는 모습에 비유했다. 또한 그 두 가지 욕구 모두 우리를 약화시킨다고 그는 주장했는데, 그의 결론에 따르면, 우리는 그것을 모두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에 초연해지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즐기며 그 혜택을 누리되, 그것에 감정적으로 얽매이지 않고 설령 그것을 잃더라도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평온은 타인의 평판에 얼마나 초연해지느냐에 달려있다.”
“명성, 즉 타인의 눈에 비치는 영광을 추구한다면 그들에게서 좋은 평판을 얻으려고 애써야 한다.”
“명성을 추구해서는 초연해질 수 없다.”
“명성과 평온은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
-미셸 드 몽테뉴
이어서 <고독에 대하여>에서는 대중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우리 욕망이 영광, 즉 명성의 추구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몽테뉴는 고찰했다. 그는 영광을 가치 있는 목표로 여기는 니콜로 마키아벨리 같은 사상가들과 반대로 명성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태도야말로 마음의 평화, 즉 평온을 얻는 데 최대의 걸림돌이 된다고 믿었다. 몽테뉴에 따르면, 영광을 바람직한 목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팔다리만 군중 밖으로 빠져 나와 있을 뿐 영혼과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군중에 단단히 얽매여” 있는 사람들이었다.
몽테뉴는 우리가 영광을 차지하느냐 차지하지 못 하느냐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요점은 우리가 타인의 눈에 비치는 영광을 좇고 싶은 욕망을 떨쳐내야 한다는 것, 즉 타인의 인정과 존경이 항상 중요하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가 권고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주변사람들의 인정을 바라지 말고, 참으로 위대하고 고귀한 존재가 늘 자기 곁에서 자신의 가장 은밀한 생각까지 지켜본다고 상상해야 한다. 그 존재가 있으면 미친 사람들조차 자신의 결함을 감추려 할 것이라고 상상해야 한다. 그렇게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명쾌하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한편, 좀더 사려 깊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처신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몽테뉴의 생각이었다.
몽테뉴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주변사람들의 평판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면 타락하게 된다. 그 까닭은 우리가 결국 사악한 자들의 흉내를 내게 되거나, 그들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나중에 쓴 글에서 영광의 추구를 다시금 비난한다. 그 글에서 몽테뉴가 지적한 바에 따르면, 영광을 차지하는 것은 보통 순전히 운에 달린 문제이므로 그것을 그렇게 떠받드는 태도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운이) 가치보다 앞서 가는 것, 종종 상당히 앞서 가는 것을 누차 보았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처럼 정치인들에게 영광을 우선시하라고 부추기는 행위는 곧 자신의 권력과 업적을 기꺼이 칭송하려는 우호적 군중을 확보하지 못하면 아무 노력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내용을 계속해서 추가하여 5판까지 개정한 몽테뉴의 ‘수상록’은 프랑스의 지식인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의 책은 유럽사회에 고대 회의주의를 부활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에 출현하는 데카르트와 프랜시스 베이컨의 업적도, 당시 대세였던 몽테뉴의 회의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철학적 작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귀족가문 출신의 젊은 아가씨 마리 드 구르네는 수상록을 읽고 감동하여, 말년의 몽테뉴를 추종하며 따라 다녔다고 한다. 몽테뉴는 그녀를 양녀로 삼고 그녀에게 그가 죽은 후에 나올 자신의 책 발행을 맡겼다. 몽테뉴는 마지막까지 수상록을 다듬었다. 후두염을 앓던 몽테뉴는 건강이 점점 나빠져 1592년 9월 13일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2022.08.21 - [philosophy/the medieval world] - 군주는 도덕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서기1469~15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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