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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증거는 단연 경험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서기 1561~1626년)philosophy/the medieval world 2022. 9. 2. 16:45반응형
최고의 증거는 단연 경험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서기 1561~1626년)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1561년 런던의 요크하우스에서 니컬러스 베이컨 경과 그의 두 번째 아내 앤 베이컨 사이에서 태어났다. 몸이 약했던 베이컨은 유년 시절 동안에는 학교에 다니지 않은 채 줄곧 집에서 가정교사에게 개인교습을 받았고, 12살이 되던 해에 학교에 입학했다.
베이컨이 입학한 곳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컬리지였다. 3년간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컬리지를 다니면서 베이컨은, 훗날 켄터베리의 대주교가 되는 존 월솔에게 개인적인 지도를 받기도 했고, 엘리자베스 1세를 처음 만나기도 했다. 그녀는 그의 조숙한 지능에 큰 감명을 받아 그를 "어린 국새관"이라고 자주 불렀다고 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의 교육은 주로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커리큘럼에는 중세 교육과정이 있었고, 그 때문에 그는 이때 아리스토텔레스를 처음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15살에 고위 법률가를 양성하는 그레이스 인(Gray's Inn)에 들어갔다. 그곳에 있으면서 베이컨은 파리 주재 영국 대사와 함께 프랑스를 여행하기도 했고, 이후 이탈리아, 스페인을 방문하면서 경험을 쌓기도 했다. 이후에 베이컨은 학업을 그만두었고, 일상적인 외교 업무를 수행하면서 언어, 국정 및 민법을 공부했다. 또한 영국 정부 및 여왕을 위해 영국에 외교 서한을 전달하기도 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18살이 되던 해인 서기 1579년에 아버지 니컬러스 베이컨경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비보를 듣고 베이컨은 즉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막내였기 때문에 유산조차 제대로 상속받지 못한 베이컨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더 큰 곤궁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씀씀이가 큰 편이었고, 그 때문에 항상 빚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더 이상 돈을 물쓰듯 하는 생활을 할 수 없었던 베이컨은 이후 매달 나오는 소량의 토지 임대료를 어머니가 그에게 준 덕분으로 근근하게 생활을 유지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외교관직을 맡아 각지를 떠돌며 생활하던 베이컨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법조계로 복귀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곤궁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20살에 프랜시스 베이컨은 콘월 주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21살에는 그레이스 인의 외부변호사로 임명되었으며, 23살에는 멜컴과 톤턴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25살에 그레이스 인의 의장이 된 프랜시스 베이컨은 1년 뒤에 그레이스 인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27살에 리버풀의 의원이 되었다. 32살에는 미들섹스의 의원이 되었고, 나중에 입스위치에서 세 번, 케임브리지 대학 지역구에서 한 번 의원이 된다.
그는 의원에 있으면서 법을 개정하고 단순화하기를 열망하는 자유주의 개혁가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비록 왕실의 친구였으나 봉건적 특권과 독재에는 반대했던 그는 종교적 박해에 대해서도 언급했으며, 상원의 권리침해적인 화폐 법안을 공격하기도 했다. 또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통합을 옹호하여 영국 통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반역 혐의를 받던 에식스 백작과의 친분 때문에 험난한 정치가로써의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베이컨은 1618년에 대법관으로 임명되었으나, 2년 후 뇌물수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직위에서 해임되게 된다.
그후 베이컨은 과학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보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기관지염에 걸려 숨을 거두었는데, 식품보존실험의 일환으로 닭 사체에 눈을 채워 넣다 그런 병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최고의 증거는 단연 경험이다.”-프랜시스 베이컨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흔히 ‘지식이란 모두 지각경험에서 비롯해야 한다고 믿’는 ‘영국 경험주의’라는 전통사상의 원조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재발견된 고대 업적에 심취해있던 르네상스기에서 지식에 대한 더 과학적인 접근법을 찾는 시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태어난 그는 숱한 과학사상가를 배출한 과학혁명기라고도 불리는 새로운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었다.
중세에 기독교는 대체로 과학을 크게 반겼다. 하지만 르네상스기에 교황의 권위에 대한 반발이 커지자 교회는 그런 태도를 접었고,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몇몇 종교개혁가들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과학의 도전에 교회가 너무 안이하게 대응해왔다며 불평하고 있는 중이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그런 비판에 응해 입장을 바꾸었고, 과학적 시도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살던 시기 종교적으로 분열된 양측의 이런 적대적 태도는 과학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중이었다.
베이컨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지식을 빠르고 쉽게 습득해 삶의 질을 향상하는 데 응용하려면 과학을 종교에서 분리해야 한다고도 주장하던 인물이었다. 베이컨은 과학이 변화의 계기로서 수행하는 역할을 늘 강조하곤 했다. 그는 이전 사람들이 학문적, 개인적 영광을 중시한 나머지 인간 존재를 향상시키는 과학적 능력을 무시해 왔다고 주장했다.
베이컨은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데 정신적 걸림돌이 되는 것 네 가지의 목록을 제시하며, 이들을 뭉뚱그려 ‘정신의 우상(idols of the mind)’이라고 일컫었다.
우상의 첫 번째는 ‘종족의 우상’이었다. 이는 인간이 하나의 종(종족)으로서 사물을 일반화하려는 성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둘째로 그가 든 우상은 ‘동굴의 우상’이었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그것에 선입관을 투사하려는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세 번째 우상은 ‘시장의 우상’. 이것은 사회적 관습이 자기 경험을 왜곡하도록 내버려두려는 성향을 뜻한다. 네 번째 우상은 ‘극장의 우상’. 이는 널리 퍼진 철학적, 과학적 학설의 그릇된 영향을 의미한다. 베이컨에 따르면 과학자는 지식을 얻으려면 이 모든 장해물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었다.
“과학지식은 그 자체에 기초한다.” “그것은 꾸준히 점증적으로 진보하며 새로운 법칙을 내놓고 새로운 발명에 이바지한다.” “그 지식 덕분에 사람들은 그것이 없었더라면 할 수 없었을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이어서 베이컨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과학의 진보는 보편성이 날로 확고해지는 법칙을 공식화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접근법의 한 유형이 포함된 과학적 방법을 하나 제안했다. 그중 하나는 과학적으로 학설을 검증하는 방법이었는데, 예컨대 가열하면 팽창하는 금속의 사례를 여럿 관찰한 후 ‘열이 모든 금속을 팽창시킨다’고 가설을 세웠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경우 베이컨에 의하면 그를 성급히 일반론으로 받들어선 안 되었다. 그 전에 가열해도 팽창하지 않는 금속 같은 부정적 사례를 계속 찾아보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새 학설을 지속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과학자도 아니었고, 과학의 후원자도 아니었던 베이컨을 과학혁명에 기여했던 인물로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제안한 이러한 과학의 새로운 방법론 때문이다. 베이컨은 과학에서 실제 실험을 중시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쳤으며, 과학적 방법을 개혁하는 것만이 모든 학문을 개선할 수 있는 길이라 믿고, 과학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면 때문에 모든 과학 진보의 원동력인 창의적 도약의 중요성을 간과했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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