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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있다, 존재한다'(르네 데카르트,서기1596~1650년)
    philosophy/the medieval world 2022. 9. 7.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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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있다, 존재한다'(르네 데카르트,서기1596~1650년)

    Rene Descartes,AD1596~1650
    Rene Descartes,AD1596~1650

    아마도 철학 사조에 있어 가장 널리 알려진 공리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문장을 남긴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 그는 서기 1596년 프랑스 투렌 지방(Touraine)의 투르 인근에 있는 소도시 라에(la Haye)에서 렌의 시의원이었던 아버지 조아킴 데카르트(Joachim Descartes)와 어머니 잔 브로샤르(Jeanne Brochard)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잔 브로샤르는 데카르트를 낳고 약 1년 1개월 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데카르트 역시 그런 어머니로부터 결핵 징후를 물려 받아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로부터 허약 체질을 물려 받은 데다 생명이 위태로웠을 만큼 몸이 좋지 않았던 데카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계속 창백하고 마른 아이였다.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그에게 친구들이 거의 없었다.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자신을 돌봐주던 간호사와 사팔뜨기 소녀 친구 프랑수아즈였다. 때문에 데카르트는 이 둘에게 놀랄 만한 정도의 충실함과 헌신을 보였다. 유산을 얻었을 때 그는 간호사에게 많은 돈을 주었고, 프랑수아즈와는 일생동안 우정을 돈독히 하며 지냈다.

    학문적으로는 뛰어난 소질을 보였지만 몸이 약했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아버지는 그 역시 아내처럼 일찍 죽을 것을 걱정하여, 그가 학교를 가고 싶다는 것을 말리고 강제로 쉬게 했다. 이후 데카르트는 다소 늦은 나이에 예수회 계열 학교인 라플레슈(La Flèche)의 콜레주루아얄이라는 학교에 들어가 약 8년간 수업을 듣게 된다.

    그가 몸이 약한 것을 알고 학교에서는 그에게 특별히 늦잠을 자도 괜찮다고 허락을 해주었다. 그래도 그는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는 이때부터 사색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수업을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데카르트의 학업 성적은 매우 우수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콜레주루아얄을 졸업한 뒤 푸아티에 대학에 들어간 르네 데카르트는 그곳에서 법학과 의학을 배웠다. 그리고 2년 뒤 20세의 나이에 푸아티에 대학에서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22살이 되던 해 학업을 중단하고 르네 데카르트는 군대에 자원 입대하게 된다. 그리고 유럽의 30년 전쟁에 참전했다. 바로 이 시기에 데카르트는 그에게 어떤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3가지 꿈을 꾸었고, 학문을 하는 것이 자신의 천직임을 깨닫게 되었다. 

    군대에서 제대한 후 르네 데카르트는 먼저 프랑스에서 잠시 소일거리로 광학기구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에 당시 파리의 추기경이었던 피에르 드베륄(Pierre de Bérulle)과 만나게 된다. 추기경은 데카르트와의 대화에서 그의 명석함에 감명을 받아 그에게 오로지 진리탐구에만 전념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데카르트는 추기경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모든 간섭과 의무를 피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건너가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곳에서 수학, 과학에 대한 연구에 힘을 쏟았던 르네 데카르트는 이후 본격적으로 철학자로써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네덜란드에 정착해 꾸준히 연구활동과 집필을 하던 르네 데카르트는 1649년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대를 받아 스웨덴으로 건너가게 된다. 여왕과 함께 철학을 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거기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평소 습관과 다르게 새벽같이 일어나야 했고, 이런 낯선 생활방식과 스웨덴의 기후 때문에 결국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급기야 그 병으로 이듬해인 1650년 향년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살아가는 동안 적어도 한 번은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르네 데카르트

     

    르네 데카르트가 살았던 17세기 초는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한 이른바 과학혁명기였다. 영국의 과학자 겸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면밀한 관찰과 귀납추리에 기초한 과학실험 방법을 확립했는데, 그의 방법론은 세계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틀을 제공했다. 데카르트는 이 새로운 과학실험 방법이 세계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확장하는 일에 기여할 것이라며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이자, 과학자이기도 했던 르네 데카르트 역시 과학적 방법론에 무척 관심이 많았고, ‘순수한 탐구활동’으로 알려진 그의 연구의 주된 동기 역시 과학에서 회의론이라는 골칫거리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었다. 형이상학(존재와 실체를 연구하는 분야)과 인식론(지식의 본질과 한계를 연구하는 분야)을 다룬 최대 역작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최대한 회의적인 입장에서 지식의 가능성을 입증하고, 이로써 과학의 확고한 토대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의 책 [성찰]은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된다(“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에서 데카르트는 특정 진술을 입증하거나 반증하는 논증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걸었던 길로 독자를 인도하고자 한다. 이런 방식 때문에 독자는 어쩔 수 없이 성찰자인 데카르트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데카르트가 했던 그대로 사색에 잠기며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연상시키는 이 접근법에서 데카르트는 이미 다 포장되어 바로 가져갈 수 있는 생각을 내놓기보다는 사람들의 이해를 서서히 이끌어내는 방법을 취한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지식의 두 주요 특징으로 여긴 ‘안정성’과 ‘지속성’이 자기 믿음에 있음을 확증하기 위해 ‘의심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용했다. 이 ‘의심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성찰자는 우선 사실성을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믿음이라면 모두 배제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의 목표는 우리가 최대한 회의적인 태도에서 시작해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지식에 이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조금이라도 의심의 여지가 있으면 모든 것을 의심하는 이 엄격한 일련의 회의적 비판이라는 도마 위에 데카르트가 올려 놓은 것은 자신의 믿음이었다. 그것을 올려놓고, 데카르트는 우선 우리가 도대체 뭔가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기는 한지부터 묻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자신의 감각을 믿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감각에 ‘속아’본 적이 있으므로, 그것을 지식의 확고한 발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우리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진짜인 듯한 세계는 꿈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는 까닭은 잠자는 상태와 깨어있는 상태를 확실히 분간할 수 있는 징표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확고히 믿는 공리, 그래서 우리의 세상을 입체적으로 구성하고 있다고 우리가 믿는 ‘진실’조차 사실상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전능한 신이 이런 수준에서까지 우리를 속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을 좋게 생각한다 해도, 신이 우리를 추론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르기 쉬운 존재로 만들어 놓았을 가능성은 있다. 어쩌면 신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우리는(그야말로 우연히 발생한) 불완전한 존재, 항상 속고 있는 존재일 공산이 생겨난다. 

    이렇듯 확실할 수 있는 대상이 전혀 없는 듯한 상태에 도움이 될 만한 생생한 수단을 데카르트는 고안해냈는데, ‘무엇에 관해서든 자신을 속일 수 있을 만큼 강력하고 사악한 악마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었다. 어떤 믿음을 숙고할 때 이렇게 자문하는 것이다. “그것이 거짓인데도 악마가 나로 하여금 그것을 믿게 할 수 있을까?” 대답이 “그렇다”라면 데카르트는 그 믿음을 미심쩍다고 보고 배제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르면 사실상 성찰자는 곤란에 처하고 만다. 그 순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대상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찰자는 전반적 의심이라는 소용돌이에 휩싸인 나머지 발 디딜 곳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나뒹굴고 있는 기분에 빠지고 만다. 

    바로 이 시점에서 데카르트 즉, 성찰자는 그가 절대 의심할 수 없는 믿음이 하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각자 “나는 있다. 존재한다”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잘못 생각하거나 말할 리가 없다. 악마검증을 이 믿음에 대입해 보자. 악마는 우리가 존재하는데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그 반대의 경우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나라는 존재가 없는데 어떻게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존재를 의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적어도 ‘존재’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나는 있다, 존재한다.”라는 이 공리는 데카르트의 제1명제가 된다. 그는 이전의 저작 [방법서설]에서는 이것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표현했는데, [성찰]을 쓸 때는 이 표현을 버렸다. “고로”를 포함한 표현은 전제와 결론처럼 읽히기 때문이었다. 데카르트는 독자, 즉 성찰하는 ‘나’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자마자 그것이 진실임을 알게 된다는 점을 깨닫길 바랐고, 이 진실은 즉시 파악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존재한다는 깨달음은 순전한 직관이지 논증의 결론이 아닌 것이다. 

    데카르트가 자기 견해를 더 명쾌히 표현하는 쪽으로 나아갔음에도 이전의 공식은 너무나 기억하기 쉬워 사람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이 제1명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그 유명한 문장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2022.09.02 - [philosophy/the medieval world] - 최고의 증거는 단연 경험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서기 1561~16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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