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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은 생물적 기계다, 토머스 홉스(서기1588~1679년)
    philosophy/the medieval world 2022. 9. 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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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생물적 기계다, 토머스 홉스(서기1588~1679)

    Thomas Hobbes,AD1588~1679
    Thomas Hobbes,AD1588~1679

    역작 <리바이어던(Leviathan)>으로 유명한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1588년 잉글랜드 윌트셔주 웨스트포트에서 교구 목사(Vicar) 토머스 홉스 시니어(Thomas Hobbes Sr.)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그의 모친이 임신 7개월 만에 조산한 칠삭동이였는데, 그의 모친이 그를 조산한 이유는 당시 무적함대로 불리던 에스파냐 군대가 영국에 상륙하여 그의 마을까지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홉스의 집안은 가난한 집안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성공회 신부면서도 술주정뱅이로 가족을 돌보지 않았고, 급기야는 주먹 다짐으로 소속 교구에서 쫓겨나게까지 되었다. 

    이후 홉스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 하지만 다행히 부유한 편이었던 삼촌이 그들을 도와준 덕분에 그는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말름스버리 학교(Malmesbury school)에 입학해 언어에 뛰어난 자질을 보인 홉스는 열네 살에 옥스퍼드 대학의 청교도적 학풍을 자랑하는 마그덜린 단과대학(Magdalen Hall)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5년간 공부한 뒤 학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마그덜린 단과대학의 교장이자 진취적인 청교도인 존 윌킨슨은 홉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홉스는 데본셔 백작 아들의 가정교사로 지내면서 그 집안의 후원으로 유럽을 여행하며 폭넓게 학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 일자리 덕분에 유럽을 두루 여행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홉스는 1629년부터 1631년 사이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을 알게 되었고, 이때 배운 기하학의 논증 방법을 자기 학문의 주요 특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1608년부터 1610년 사이에 홉스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프랜시스 베이컨과 교류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홉스는 프랑스 철학자 마랭 메르센(Marin Mersenne), 피에르 가상디(Pierre Gassendi), 르네 데카르트,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 이름난 과학자와 사상가들을 만나기도 했다.

    서기 1640년에 영국 내전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한 후, 홉스는 그곳에서 11년을 보냈다. 1642년 파리에서 그는 그의 첫 저서 [시민론]을 출간했다. 이후 홉스는 그를 유명하게 만든 책 [리바이어던]을 출간했고, 바로 그 책에서 그는 사회, 국가의 기능 및 도덕과 정치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혔다. 

    위대한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번역가이자 수학자로도 명성이 높았던 홉스는 노년에도 계속 집필에 매진하다 향년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생명은 팔과 다리의 운동에 불과하다.”-토머스 홉스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정치철학으로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주제로 많은 글을 남긴 사람이었다. 그의 견해는 대부분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물질주의 옹호론은 특히 많은 반박을 낳은 이론이었다. 

    물질주의 옹호론이란 만물이 사실상 물질일 뿐이라는 학설로, 이 학설에 따르면 정신이나 초자연적 존재같은 다른 자연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살과 피로 구성된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홉스의 생각이었다. 

    홉스가 살던 시기는 자연과학지식이 급속도로 불어나면서,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있었거나 잘못 알려졌던 현상을 명쾌히 설명할 수 있게 되었던 시기였다. ‘근대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이도 이 시대 사람이었고, 과학 실천의 혁신을 일으키는 데 일조한 프랜시스 베이컨과도 홉스는 긴밀한 교류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 때문에 홉스 역시 그 시대의 여느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으로 이룰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없다고 믿었으며, 세계의 본질에 대한 어떤 질문이든 과학적이고, 공식화된 설명으로 답할 수 있다고 단정하는 사람이었다. 

    정치문제를 다룬 그의 대표작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우주 만물은 유형의 물체다라고 선언한 뒤 이어서 그런 물체는 모두 길이, 너비, 깊이가 있고, 물체가 아닌 것은 우주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만물의 본질이 순전히 물질적이라고 생각했던 홉스는 그 물질성 때문에 우리가 만물을 모두 인식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물질적 공간을 차지하며 물질적 차원을 갖추고 있음에도 인식 불가능한 물체도 있다. 이것들을 그는 정기라고 일컬었다. 

    동물 정기라는 것이 세상에는 존재하는데 홉스는 그 동물 정기가 동물 대부분의 활동, 특히 인간의 활동을 유발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동물 정기는 육체 주위를 맴돌며 정보를 운반하고 전달하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신경계의 작용방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홉스는 이런 물질적 정기 개념을 신과 천사 같은 종교적 실체에도 적용했다. 하지만 홉스는 물질적 정기 중 신만은 무한의 존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홉스가 보기에 신의 신성한 속성은 인간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므로 무형이라는 말은 불가지인 신의 실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유일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종교적 실체의 존재와 본질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고, 특히 신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밖에 계속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인간이 신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신이 존재한다는 점, 우주 만물을 창조한 조물주라는 점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홉스는 인간이란 순전히 물질적인 존재이고 따라서 생물적 기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고, 그러다 보니, 인간 정신의 본질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홉스는 정신은 미세한 물체이고, 인식은 외계의 운동이 감관에 주는 인상에서 생기며, 그것은 실제의 모사가 아닌 주관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 주관적인 방식은 개개인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추상적, 보편적 개념은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과학으로 결국 밝혀낼 수 있을 듯싶은 사실을 일반적, 개략적으로 설명했던 홉스는 자발적 활동, 식욕이나 혐오 같은 정신 기계적 관점에서 연구하고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라고 보았고, ‘의식의 문제에 까지는 착목하려고 하지 않았다. 의식의 주관적 일인칭 경험의 본질을 설명하는 문제는 홉스가 풀지 못한 문제였던 것이다. 

    현대 과학에서도 자연과학의 객체와 의식경험의 주체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부조화한 그 무엇이 있다고 여기는데, 홉스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인식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홉스가 말하는 물질적 정기는 다른 유형의 물질적 사물과 똑같은 속성밖에 취할 수 없으므로, 그것만으로는 인간의 정신적 본질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성찰(1641)]에서 정신과 육체 사이에 실제적 차이가 있다는 생각, 즉 그 둘이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실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홉스는 데카르트의 결론(‘정신과 육체는 별개의 실체다’)을 거부하는데, 그가 제시하는 근거는 육체가 유일한 형태의 실체이며 무형의 실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자신의 가정에 기댄 것이었다.

    그의 이런 기계론적 유물론은 시대정신과 긴밀히 보조를 맞추며, 우주의 작동원리 및 실체, 인간 본성 및 사회질서에 대한 통설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사고의 혁신이 현대 세계의 또다른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2022.09.02 - [philosophy/the medieval world] - 최고의 증거는 단연 경험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서기 1561~16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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