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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실처럼 여겨지는 것은 잠정적 가설에 불과하다’, 볼테르(서기 1694~1778년)
    philosophy/the age of revolution 2022. 10. 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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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처럼 여겨지는 것은 잠정적 가설에 불과하’, 볼테르(서기 1694~1778)

    Voltaire,AD1674~1778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볼테르(프랑수아 마리 아루에의 필명)는 파리의 중산층 가정에서 세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볼테르의 아버지는 부유한 공증인이었는데, 그 덕분에 볼테르는 어릴 때부터 파리의 유서 깊은 예수회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볼테르는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재치가 있었다고 한다. 12살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던 그는 이미 그때부터 글재주를 인정받았는데, 대부였던 샤토뇌프 신부가 상류 사회에 소개해 줌으로써 그는 동창들과 함께 귀족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20살 때부터 당시 유명한 사교계 모임인 르 탕플(le Temple)에 출입할 수 있었던 볼테르는 그곳에서 당대의 많은 자유사상가들과 교류를 했다. 그리고 1년 뒤 루이 14세가 죽고 오를레앙 공이 섭정을 시작했을 때, 그가 지은 시구가 문제가 되어 바스티유 감옥에 11개월간 투옥되게 된다. 

    문제가 된 것은 나는 이 모든 악행을 보았네. 나는 스무 살이 아니었네”라는 별것 아닌 싯귀였다. 그 아무 것도 아닌 싯귀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는 11개월 동안 볼테르는 비극 《오이디푸스 (Edipe)》의 초고를 집필했고, 출옥 후 공연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이때부터 그는 '아루에'라는 자신의 성() 대신, '볼테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726, 일찍 성공을 하여 거칠 것이 없었던 30살의 볼테르에게, 귀족 청년 '슈발리에 드 로앙' ()도 없는 부르주아’라고 빈정대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볼테르는 내 성은 나로부터 시작하지만, 당신의 성은 당신에게서 끝날 것이오”라고 응수하였고, 화가 난 귀족 로앙은 하인들을 시켜 거리에서 볼테르에게 몽둥이찜질을 퍼부었다. 이에 분개한 볼테르는 이 귀족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감히 귀족에게 도전장을 던진 그의 오만불손한 태도는 당시만 해도 굳건하던 신분사회 속 귀족들의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했다. 자신과 친하다고 생각했던 귀족들이 모두 그 귀족 편을 들었고, 그 바람에 볼테르는 또다시 바스티유에 갇히게 된다.

    이미 한 차례 수감 생활을 경험한 볼테르는 그 끔찍한 생활을 계속하기가 더 힘이 들었다. 그는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자신의 석방을 청원하였고, 결국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간다는 것을 조건으로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영국으로 향하는 망명길에서 귀족계급의 횡포에 대해 곱씹은 울분과 분노가, 이후 볼테르의 계몽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제 신분의 불평등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된 볼테르는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은행가들과 교분을 쌓고 투자와 대출 사업에 참여해 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망명이나 다름없었던 볼테르의 영국 생활은 의외로 그에게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게 되었다. 이 시기에 볼테르는 셰익스피어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카페에 드나들었고 《걸리버 여행기》를 쓴 스위프트와 교류하였으며,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로크와 과학자 뉴턴의 책에 열광하기도 했다.

    1728년 다시 파리로 돌아온 볼테르는 1734년에 영국에서의 경험들을 엮어 《철학 편지》를 발표했다. 하지만 검열당국에 의해 그것이 "종교와 사회에 가장 큰 해악을 가져다 줄 방종을 부추기는 위험한 책"으로 지정되어 또다시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후 자신의 후견인이자 연인이었던 뒤 샤틀레 부인(Madame du Châtelet)의 영지로 도피하여 이때부터 근 10년간을 숨어지내게 된다. 샤틀레 부인은 자신의 실험실을 갖고 있던 물리학자이기도 했고, 뉴턴의 이론과 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부인은 볼테르에게 물리학과 수학을 가르쳐 주었고, 볼테르는 부인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두 사람은 함께 여행하며 사람들과 교제를 이어 갔는데, 여기서 만난 친구 다르장송의 추천으로 볼테르는 국왕의 사료편찬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볼테르-샤틀레 커플은 파리로 돌아와 파리 중심부에서 남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소(Sceaux)에 자신들의 궁정을 만들었다. 그러나 임신한 샤틀레 부인이 아이를 낳다 죽게 되고, 볼테르는 슬픔에 잠긴 채 홀로 남게 된다. 볼테르는 전에 프러시아 왕의 초대를 받았던 일을 생각해내고 모든 것을 잊기 위해 1750년 프러시아의 포츠담으로 떠났다.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왕에게 특별한 호의와 자유를 약속 받은 볼테르는 여기서 프리드리히 왕이 프랑스어로 시를 지으면 그것을 교정해 주는 역할을 했다. 그 대가로 2만 리브르( 8만 달러)라는 큰 돈을 받았지만 성격 차가 컸던 두 사람은 3년 후 결국 결별하고 만다. 이후 볼테르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루이 15세가 파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를 막았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이미 상당히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던 볼테르는 결국 귀국을 포기했다. 볼레르는 1754년 국경 너머 스위스 제네바 시내에 델리스(délice: 열락이라는 뜻)라고 이름 붙인 집을 짓고는 거기서 살았다. 극장도 지어 연극을 공연했고, 비서와 요리사를 두었기 때문에 독립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이때 볼테르는 《리스본 대지진에 관한 시》를 출간랬고, 디드로가 주도한 《백과전서》 편찬에도 협력을 했다. 그의 대표작 《캉디드》가 쓰여진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제네바 공화국은 칼뱅주의 하에 연극 등의 공연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볼테르는 제네바 시민들과 종종 마찰을 빚었다. 

    볼테르는 1758, 제네바에서 조금 떨어진 프랑스 영토인 투르네와 페흐네에 토지를 사들여 그곳에 자신의 성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국경 근처라 스위스와 문제가 생기면 프랑스로 도망가고, 프랑스와 문제가 생기면 스위스로 도피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철학자들은 뒤쫓아오는 개들을 피하기 위해 땅 속에 두세 개의 굴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볼테르의 말이기도 했다. 

    페흐네는 당시 인구가 50명에 불과한 척박한 땅이었다. 볼테르는 이곳에 직물 공장과 시계 공장을 세웠고, 제네바 공화국에서 빠져나온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정착시켰다. 그 덕분에 20년 후 그가 이곳을 떠나게 되었을 때는 인구가 1200명으로 늘게 되었다.(페흐네는 볼테르 사후인 1791년 개칭하여 페흐네-볼테르(Ferney-Voltaire)라는 이름을 가진 인구 1만이 조금 안 되는 규모의 코뮌으로 현존한다.)

    페흐네에 진영을 구축한 볼테르는, 이성과 문명을 옹호하며 부당한 권력과 종교의 광신에 맞서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싸우는 지성의 투사 역할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칼라스 사건이 대표적이었다. 칼라스 사건이란 개신교도인 칼라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아들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은 일이었다. 소문에 의한 명백한 누명이었지만 판사들은 칼라스가 개신교라는 이유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이 사건은 억울하게 묻힐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볼테르는 광신이 빚은 비극임을 알아차리고 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고등법원의 사건기록을 입수해 분석하고, 칼라스 가족을 도와 국왕의 재판정에 상고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이 문제에 관한 팸플릿을 써서 주변 지식인들에게 전달하는 등 일련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를 통해 결국 재심을 요구하는 여론을 조성하는데 성공하였고, 3년 뒤 칼라스의 무죄와 복권을 이끌어냈다. 1763년에 발표된 《관용론》이, 이 칼라스 사건을 계기로 쓰여진 것이었다.

    1778년 무렵, 루이 15세가 사망하고 난 뒤 볼테르는 파리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84세가 된 볼테르가 장장 28년 만에 프랑스로 귀환할 때, 수많은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마치 개선장군처럼 수도로 들어왔다고 하며, 이를 전해들은 루이 16세가 질투심을 느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긴 여행에 따른 피로와 연일 이어지는 환영행사를 이겨내지 못하고 볼테르는 석 달이 못되어 숨을 거뒀다. 사망을 앞두고 병자성사를 하러 온 사제가 기독교 비판으로 유명한 볼테르를 굴복시키기 위해 그에게 악마를 부정하라고 하자, 볼테르는 "여보게 자네... 지금은 새로운 적을 만들 때가 아닐세..."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후 프랑스 혁명기에 그의 유해는 프랑스의 역사적 위인들을 모시는 판테옹에 안치되었다. 그는 판테옹에 안치된 두 번째 인물이었지만 판테옹에 첫번째로 안치된 미라보 백작의 묘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판테옹에서 철거당했기 때문에, 볼테르는 결국 운명적으로 프랑스의 모든 위인 가운데서도 첫번째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프랑스는 볼테르의 나라'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역사로 기록된 사실과 이론은 모두 어떤 시점에서 수정되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머릿속에 여러 관념과 개념을 품은 채로 태어나지 않는다. 모든 관념과 이론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의심하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확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볼테르

     

    볼테르는 프랑스의 계몽기에 살았던 지식인이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계몽기는 세계와 사람들이 사는 방식에 대한 의문이 치열하게 제기되었던 시기였다. 유럽의 철학자와 작가들은 기독교와 국가 같은 승인된 지배세력을 주목하며 그 정당성과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새로운 사고방식을 모색했다. 17세기까지 유럽인들은 대부분 무엇이 왜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기독교적 설명을 받아들였지만,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다른 진리탐구방법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1690년에 철학자 존 로크는 어떤 관념도 본유적이지 않으며 관념이란 모두 경험에서만 비롯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아이작 뉴턴 덕분에 더욱더 강화되었다. 뉴턴의 실험은 새로운 진리탐구방법을 내놓았다. 볼테르가 확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선언한 사건은 그동안 승인된 전통에 대한 도전의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 

    볼테르는 확신이라는 관념을 두 가지 측면에서 논박한다. 첫째, 수학과 논리학의 몇몇 필연적 진리를 제외한 역사상의 사실과 이론은 대부분 어떤 시점에서 수정되었다. 따라서 사실처럼 여겨지는 것은 실제로 잠정적 가설에 불과하다. 둘째, 그는 본유적 관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로크의 주장에 동의하며,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진리로 여기는 관념이란 사실상 나라별로 다른 문화적 요소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볼테르가 보기에 계몽기의 과학실험은 실증적 증거와 당돌한 호기심을 기반으로 하여, 더 나은 세계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었다. 볼테르는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지는 않지만, 그에 이르는 수단을 인간은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의심이 유일하게 타당한 관점이라고 생각했다. 의견이란 끊임없이 충돌하게 마련이므로 과학처럼 합의를 이끌어내는 체계를 개발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확신이 의심보다 더 유쾌하다고 말하면서 볼테르는 권위 있는 진술(기독교나 군주국에서 공표한 진술)을 그냥 받아들이기가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스스로 고민하기보다 얼마나 더 쉬운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볼테르는 모든 사실을 의심하고 모든 권위에 의심을 제기하는 일이 지극히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정부는 규제되어야 하나 연설은 검열되지 말아야 한다고, 과학과 교육이 물질적, 도덕적 진보를 가져온다고 믿었다. 근대적인 지식과 사고방법으로 당시 사람들을 계몽하고 비판했던 볼테르의 신념은 계몽주의의 근본적 이상일 뿐 아니라 볼테르가 죽고 11년이 지난 후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근본적 이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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