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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은 지하감옥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가 살 만한 장소가 되는가?’, 장자크 루소(서기1712~1778년)philosophy/the age of revolution 2022. 10. 8. 17:48반응형
‘평온은 지하감옥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가 살 만한 장소가 되는가?’, 장자크 루소(서기1712~1778년)
사상가이자 교육학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스위스 제네바(Geneva)의 칼뱅파(Calvinist)가정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이작 루소는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제네바의 시민 계급이었지만 집안은 가난했다. 어머니는 출산 후 며칠 만에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아내를 잃어버린 것을 슬퍼하며 아버지가 어린 루소를 붙잡고 울었다는 이야기가 그의 책 ‘고백록’에 등장한다. 아내없이 약 10년 간 루소를 홀로 키웠던 아버지는 귀족과의 다툼 이후 집을 나가버렸고, 그 바람에 루소는 졸지에 외삼촌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이후 16살 때 루소는 프랑스로 가서 자신의 종교를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작곡가로 명성을 얻으려 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새로운 악보 표기법을 파리의 과학 아카데미에서 발표하는 등 성과도 있었고, 그를 계기로 아카데미 회원 사람들과도 교분을 틀 수 있었다.
1743년 장 자크 루소는 사교계에서 알게 된 한 귀부인의 도움을 받아 베네치아 주재 프랑스 대사의 비서로 채용되었다. 이는 루소에게 이탈리아 음악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루소는 그곳에서 이탈리아의 음악과 문화를 충분히 만끽했지만, 프랑스 대사는 지속적으로 월급을 체납했고, 이 때문에 루소는 11개월 만에 비서직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왔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에도 루소는 음악에 꾸준히 관심을 가졌다. 그는 1751년에 디드로가 편집을 맡은 《백과전서》에 음악 관련 부문을 집필했고, 1년 뒤엔 단막극 오페라 각본 《마을의 점쟁이 Le Devin du village》를 완성했다. 이 짧은 오페라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도 그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이 한 편의 오페라를 통해 루소는 어엿한 한 명의 음악가로서 프랑스 전역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750년 학술 논문 대회에 자신의 논문 <과학 예술론>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루소는 철학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인간불평등 기원론>, <정치경제론>, <사회계약론> 등 견해에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작품들을 잇따라 발표한 루소는 그 탓에 스위스와 프랑스에서는 박해에 가까운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의 책이 금서로 묶였고, 그 앞으로 체포영장까지 발부되었던 것이다. 루소는 어쩔 수 없이 데이비드 흄의 초청에 응해 영국에 잠깐 머물렀으나 흄과 다툰 후 가명으로 프랑스에 돌아왔다. 나중에 그는 파리로 돌아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거기서 여생을 보내다 6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다. 사유재산 개념이 발전함에 따라 사회는 그것을 보호할 제도를 개발해야 했다. 이 제도는 유산계급이 무산계급에 준수를 강요하는 법률로 발전했다. 이런 법률은 사람들을 부당한 방식으로 속박한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에서나 쇠사슬에 얽매여 있다.”-장 자크 루소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계몽기로 알려진 18세기 중후반의 유럽대륙에서 활동하던 철학자였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인간의 이성이 꽃을 피우는, 소위 ‘계몽의 시기’였다. 루소는 계몽주의자와 함께하면서도 또한 그들을 비판하기도 한 사상가였다. 젊은 시절 그는 음악가로 명성을 얻으려고 애썼지만, 1740년에 철학자이자 [백과전서] 편찬자인 드니 디드로와 장 르 롱 달랑베르를 만나면서 철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정치적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프랑스와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현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며 교회와 귀족의 권위를 흔들었고, 볼테르 같은 사회개혁 주창자들은 지배층의 고압적 검열에 끈질기게 맞서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소의 주요 관심분야는 정치철학이 되었다. 그의 생각은 동시대의 프랑스 사상, 그리고 영국 철학자들의 저작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특히 토머스 홉스가 제창하고 존 로크가 다듬은 사회계약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루소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가상적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성 개념과 사람들이 문명사회에서 실제로 사는 방식을 비교했는데, 그는 사회의 영향을 받은 생활방식과 자연 상태에 대해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을 취했다. 때문에 루소의 사상은 일종의 ‘반계몽주의’ 사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사실상 그의 사상은 계몽주의보다 다음에 유행할 낭만주의운동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일반의지는 모두에게서 비롯되어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장 자크 루소
토머스 홉스는 자연 상태의 삶을 “고독하고 궁핍하고 추잡하고 야만스러우며 빈약한 삶”으로 묘사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데, 그런 본능을 규제하려면 문명이 필요하다. 반면에 루소는 인간 본성을 더 긍정적으로 보는 한편 문명사회를 훨씬 덜 호의적인 세력으로 여겼다.
사회가 인간에게 해로우리라는 생각이 루소에게 처음 떠오른 것은 그가 디종(Dijon)아카데미의 논문 공모에 참가하려고 준비할 때였다. 그때 루소가 답해야 했던 문제는 “과학과 예술의 진보가 도덕의 향상에 기여했는가?”였다. 당대의 사상가들, 특히 루소 같은 음악가가 으레 내놓을 법한 답은 열렬한 긍정론이었지만, 루소는 정반대 주장을 내놓았다. 당선작으로 뽑힌 [과학, 예술론]에서 그는 예술과 과학이 도덕을 타락시키고 좀먹는다는 경악스러운 견해를 제시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술과 과학은 정신과 삶을 개선하기는 커녕 인간의 가치와 행복을 감소시킨다.
공식적 찬사를 받은 수상작에서 기성 사상과 갈라선 루소는 두 번째 논문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앞서 제시한 생각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그 논문의 주제는 당시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며 볼테르 같은 작가들의 사회개혁 요구에 공명했지만, 이번에도 루소는 전통적 관념을 조목조목 논박했다. 토머스 홉스가 묘사한 이기적이고 야만스러우며 부조리한 자연 상태는 루소가 보기에 ‘자연인’이 아니라 ‘문명인’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야만적 상태를 낳는 것은 바로 문명사회였다. 인간의 자연 상태는 순결하고 행복하며 독립적이었다. 요컨대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다. 그가 생각하기에 아담과 이브는 사회가 형성되기 전에 살던 ‘자연인’의 완벽한 표상이었다. 루소에 따르면, 그들과 마찬가지로(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통해 타락에 이르렀듯이) 우리는 지식 때문에 타락해 이기적이고 불행한 존재가 된 것이다.
루소가 묘사하는 자연 상태는 목가적 전원이었다. 그 상태에서 사는 자연인들은 근본적으로 선하다.(영국에서는 루소의 자연인 개념을 ‘고결한 야만인(noble savage)’으로 해석했는데, 이는 프랑스어 ‘sauvage’를 오역했기 때문이다. 당시 ‘sauvage’는 ‘자연의’를 의미했을 뿐 ‘야만의’를 뜻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본유적 덕과 아울러 타인에게 동정하고 공감하는 속성을 타고난다. 그러나 일단 이 순결한 상태가 붕괴되고 이성의 힘이 인간을 자연의 평온에서 이탈시키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타고난 덕성에서 멀어진다. 따라서 자연 상태에 문명사회가 도입되면 미덕에서 악덕으로의 변화, 목가적 행복에서 불행으로의 변화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루소의 지적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문명 상태로의 변화는 미덕에서 악덕으로의 변화 뿐 아니라 순결과 자유에서 불의와 속박으로의 변화도 가져왔다. 인간은 본래 도덕적이지만 사회 때문에 타락했다. 인간은 본래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회가 강요하는 법 때문에 “쇠사슬에 얽매여” 살아가게 된 것이다.
자연 상태를 야만적이지 않고 바람직한 상태로 묘사한 그의 이상상은 문학에서 갓 일어난 낭만주의운동의 핵심부를 형성하게 되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루소의 구호와 근대사회를 불평등과 불의로 가득한 집단으로 본 그의 비관적 분석은 1750년대 프랑스에서 유난히 심화되고 있던 사회적 불안과 잘 어울렸고, 그의 사상은 나중에 프랑스공화국의 표어가 되기까지 했다.
2022.10.04 - [philosophy/the age of revolution] - ‘습관은 생활의 훌륭한 길잡이다’, 데이비드 흄(서기1711~17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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