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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동은 이기심에서 비롯한다’, 애덤 스미스(서기1723~1790년)philosophy/the age of revolution 2022. 10. 13. 17:46반응형
‘인간의 행동은 이기심에서 비롯한다’, 애덤 스미스(서기1723~1790년)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
는 철학자 애덤 스미스는 서기 1723년 스코틀랜드 파이프(Fife)의 커콜디(Kirkcaldy)라는 지방에서 태어났다. 세무 관리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세례받기 약 6개월 전에 사망했고, 애덤 스미스는 4살경에 집시 무리에게 한 번 납치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행히 삼촌이 그를 집시 무리의 손에서 다시 구출해내주었고, 그를 다시 어머니 마거릿 스미스에게로 돌려주었다.
어려서 부터 학문에 두각을 나타냈던 애덤 스미스는 14살에 글래스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친구였던 프랜시스 허치슨으로부터 윤리철학을 공부했다. 이후 17살이던 1740년에 옥스퍼드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1746년에 자퇴했고, 1748년에 케임스 경의 후원으로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공개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의 강의는 인기가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글래스고 대학에서도 강사로 일하다가 1750년 정식으로 교수로 임용되게 되었다.
1750년부터 데이비드 흄과 교분을 맺기 시작한 애덤 스미스는 1759년 유럽에 그의 명성을 떨치게 해준 책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발표했고, 1764년부터 타운젠트 공작 장남이었던 어린 스코틀랜드의 귀족 헨리 스콧의 개인 교수가 되어 상당한 보수를 받으며 프랑스와 스위스를 여행했다. 개인교수로서의 그의 임무는 소년과 여행을 같이 다니면서 견문을 넓혀주는 것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이 2년에 걸친 여행을 통해 여러 나라의 행정 조직을 시찰하고 중농주의 사상가들의 사상과 이론을 흡수했다.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애덤 스미스는 10년 간 [국부론] 집필에 힘을 쏟았다. 그 시대는 아직까지 각 개인의 경제적 자유가 지금처럼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지 않던 시대였다. 국가가 개인의 경제 활동을 통제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여겨졌고, 세금, 수출입 규제 등은 체계적인 이론적 바탕 없이 자의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런데 국부론에서 그는 정부가 민간의 경제 생활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내버려두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여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국가의 경제 발전이 보다 많이 이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의 기능을 최소한으로 축소시켜 정부의 역할을 소극적인 경찰관의 지위로까지 낮춘 야경 국가론을 펼쳤다.
애덤 스미스는 1778년 관세청장으로 공직에 복귀했고, 여러 경제정책에 대해 영국 정부에 조언했다. 그리고 1787년 그는 글래스고 대학으로 돌아와 인생의 마지막 3년을 총장으로서 보냈다.
“인간의 행동은 이기심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이 제공하는 재화와 용역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측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재화나 돈을 교환하는 데 동의해야 한다. 인간은 흥정하는 동물이다.”-애덤 스미스
스코틀랜드의 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종종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로 평가받는다. 그가 탐구한 거래 및 사욕私慾개념과 더불어 여러 가지 합의 및 이익(‘공동의 이익’등)의 가능성은 끊임없이 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그의 저작물 또한 친구인 데이비드 흄이 발전시킨 ‘상업적’ 사회라는 개념에 더 일반적, 이론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스미스는 스위스의 동시대인 장 자크 루소처럼 인간의 동기가 자선적인 한편 이기적이라고 여기지만, 이기적 속성이 더 강해 인간행동의 주도적 길잡이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관찰을 통해 이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때문에 그의 접근법은 대체로 실증적인 것들이었다. 거래의 심리를 다룬 유명한 논의에서 그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거래를 시작할 때 가장 흔히 하는 말은 한쪽이 상대방을 이렇게 죄어치는 것이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최선의 방법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주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 말은 곧 이런 뜻이었다. “우리는 (타인의) 인간애가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한다.”
스미스는 유용한 물건을 교환하는 행위가 인간 고유의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관찰한 바, 개끼리는 뼈를 교환하는 법이 없다. 만약 어떤 동물이 뭔가를 얻고자 한다면, 그것의 유일한 방법은 “그 동물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누군가의 환심을 사는 것”이었다. 인간 또한 이런 “알랑거리고 굽실대는 친절”에 의존하긴 하지만,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도움과 협조”가 필요하다. 예컨대 우리가 여관에서 하룻밤을 편안히 묵으려면, 여러 사람이 투입되어 음식을 요리해 내오기도 하고 방을 정돈하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중 어느 서비스도 호의만으로는 제공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인간은 흥정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그 흥정을 성사시키려면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듯한 거래를 제안해야 한다.
시장경제의 출현을 설명하면서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흥정 덕분에 사람들은 점점 더 소수의 품목에 집중하다가 결국 단일 품목만 생산하거나 단일 서비스만 제공하는 한편, 그것을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과 교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 돈이 발명되어 물물교환이 불필요해짐에 따라 이 과정에서 혁신이 일어난 것이다. 스미스가 보기에 이때부터는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만 자선행위에 의존해야 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시장에 가서 자신의 노동(혹은 노동으로 번 돈)을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생산된 상품과 교환해야 한다.
이처럼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특별한 기술을 갖춘 사람들(제빵사, 목수 등)이 등장한다. 그리고 노동자들 사이에 ‘분업’이 나타난다. 분업은 ‘전문화’의 스미스식 표현이었다. 이로써 개인은 단일 직종에 종사할 뿐 아니라 단일 업무만 수행하며 여러 사람과 일을 나물 수 있게 된다. 스미스는 걸작 [국부론]의 앞부분에서 전문화의 중요성을 예증하려고, 공장제도를 채택할 경우 옷핀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급격히 개선되는지를 보여주었다. 한 사람이 혼자 일하면 하루에 20개를 완성하기도 버겁겠지만, 스미스가 살던 시대에 열 사람이 공정(철사를 뽑고, 곧게 펴고, 자르고, 끝을 뾰족하게 만들고, 연마기로 간 후, 핀 머리에 결합하는 공정)을 분담하면 하루에 4만 8천 개가 넘는 옷핀을 만들 수 있었다.
스미스는 산업혁명기에 생산성이 엄청나게 향상되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시기에는 노동자들이 훨씬 좋은 장비를 지급받았고, 기계가 노동자를 대체할 때도 많았지만 이런 체제 안에서 팔방미인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심지어 철학자들도 자기가 다루는 주제에 맞는 분야들(논리학, 윤리학, 인식론, 형이상학 등)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노동자의 생산력이 엄청나게 향상된 것은 분업의 효과인 듯하다.” -애덤 스미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시장은 공평한 사회를 수립하는 열쇠였다. 상품을 사고파는 데 따르는 자유 덕분에 사람들은 ‘천부의 자유권’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분업 덕분에 생산성이 높아지고 누구나 어떤 종류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특정 활동에 필요한 기술을 모두 배울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사회질서가 잡히면 모든 사람이 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애덤 스미스는 주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완벽한 자유가 보장될 경우 시장은 완벽하게 평등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 그런 시장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 이익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스미스가 말하는 평등이란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조건의 평등이었다. 바꿔 말하면 그의 목표는 경쟁으로 분열된 사회가 아니라 상호이익에 기초한 거래로 단결된 사회를 세우는 일이었던 것이다.
스미스 주장의 요지는 사람들이 단지 그래야 마땅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각자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 사회 전체가 이득을 본다는 것이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과 그에 따르는 수요 공급의 법칙이 그 어느 정부보다 훨씬 효과적인 방식으로 상품의 양을 조절하고 가격을 책정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스미스가 보기에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공평한 사회와 모순되기는커녕 그런 사회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 사회에서는 정부가 국방, 사법, 교육 등 몇몇 필수적 기능만 수행하도록 축소될 것이고, 그에 따라 세금과 의무도 줄어들 것이다. 뿐만 아니라 거래는 국내에서 활성화되듯이 나라 사이에서도 활성화되어 국제무역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스미스 역시 자기 주장이 내포하고 있는 결핍점도 함께 인식하고 있었다. 분업이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낳긴 하지만 반복적 업무가 노동자를 지루하게 만들 뿐 아니라 인간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점 역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정부가 생산라인의 활용 정도를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부론]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그 책의 자유거래원칙은 혁신적이라고 여겨졌다. 그 원칙에서는 기존 농×상업의 특권과 독점을 비판했을 뿐 아니라 나라의 경제력이 금 보유량이 아닌 노동력에 달려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국부론]에는 경제학이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시장의 자기통제를 강조한 표현인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유명한 말도 단 한 차례 나올 뿐이다. 스미스 자신도 그를 경제학자라고 부른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을 ‘도덕철학자(moral philosopher)’라고 생각했다. 그가 [국부론]에서 다루고 있는 “한 나라의 부는 어떠한 질서 또는 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하는 정치경제학적 질문도 그가 평생을 두고 연구한 도덕철학이라는 틀 안에서 조망한 명제였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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