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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는 곧 계약이다’, 에드먼드 버크(서기 1729~1797년)
    philosophy/the age of revolution 2022. 11. 11.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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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mund Burke,AD1729~1797
    Edmund Burke,AD1729~1797

    사회는 곧 계약이다’, 에드먼드 버크(서기 1729~1797)

    영국계 아일랜드 정치가인 에드먼드 버크는 더블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젊은 시절부터 철학이 정치에 유용한 훈련이라고 확신한 그는 1750년대에 사회의 기원과 미학을 다룬 뛰어난 논문을 여러 편 썼다. 또 그는 휘그당(Whig Party, 휘그당은 당시의 두 귀족 정당 중 더 자유주의적인 진영이었다)의 주요 당원으로서 1766년부터 1794년까지 영국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버크는 미국 독립운동이 일어날 만도 하다고, 그 운동이 전적으로 정당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믿었다. 나중에 그는 인도 총독 워런 헤이스팅스(Warren Hastings)를 탄핵하는 일에 관여하기도 했다. 이후 죽는 날까지 식민지시대의 부정행위를 통렬히 비판한 버크는 대영 제국의 양심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인간은 물질적, 과학적, 예술적, 도덕적 욕구가 있다. 그들은 이 모든 욕구를 자력으로 충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가능한 한 조상들의 관습과 종교를 참고한다. 그들은 서로 돕자는 데 동의하는데, 그것이 서로의 욕구를 충족하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곧 계약이다.” -에드먼드 버크

     

    사회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외친다. “내 잘못이 아니야. … 사회를 비난하라고!” 그러나 사회라는 단어의 의미는 그리 명료하지도 않을 뿐더러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왔다. 아일랜드의 철학가이자 정치가인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저술활동을 하던 18세기에는 유럽이 점점 더 상업화되고 있었고, 사회란 영리회사와 마찬가지로 구성원들간의 계약이라는 생각이 쉽게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는 오로지 물질적인 것만 중요하다는 생각도 담겨있다. 이런 불균형을 바로잡으려고 버크는 과학, 예술, 미덕으로도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그리고 사회가 계약, 협약이긴 하지만 경제나 추잡한 동물적 생활에만 관련된 것은 아님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려 했다. 사회는 공익의 구현(관습, 규범, 가치관에 대한 합의)이지만, 버크가 생각하는 사회는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할 뿐 아니라 조상과 후손도 포함한다. 더구나 모든 정치체제는 영원한 사회의 위대한 원시계약의 일부이므로, 신은 사회의 근본적 보증인인 셈이다. 

    버크는 원죄의 교리(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생각)를 중요시하므로, 자기 행위의 책임을 사회에 돌리려는 사람들을 거의 동정하지 않는다. 또 그는 누구나 교육을 받으면 완벽해질 수 있다는 존 로크의 주장(인간은 모두 결백하게 태어났으니 올바른 영향만 받으면 된다는 식의 주장)을 일축해버린다. 버크가 생각하기에 개인 판단의 불완전성은 곧 도덕적 태도를 제시하는 전통이 인간에게 필요한 이유다. 이 주장은 습관은 인간생활의 위대한 길잡이다라는 데이비드 흄의 주장을 연상시킨다. 

     사회는 과거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유기적 조직이므로, 에드먼드 버크는 정치체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전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런 자연적 흐름을 끊어버리는 전면적, 급진적 정치 변화에 반대했다. 그래서 버크는 1789년의 프랑스혁명을 반대하며, 왕이 처형되고 1년 간 공포정치가 행해지기 한참 전에 혁명의 위험을 예견했다. 같은 이유로 그는 장 자크 루소를 수차례 비난하기도 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국민과 국가 간의 계약이란 국민들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 파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버크의 또 다른 표적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조지프 프리스틀리(Joshph priestley)였다. 그는 프랑스 혁명에 갈채를 보내는 한편 원죄 관념을 대놓고 비난했다. 

    근대 상업사회를 회의적으로 바라보았음에도 버크는 사유재산제도를 열렬히 옹호하고 자유시장을 낙관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흔히 현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린다(보수주의에서는 전통과 경제적 자유를 모두 중요시한다).

    오늘날에는 심지어 사회주의자도 사유재산의 가치에 대해서는 버크와 생각을 달리하겠지만 사유재산제도가 필수적 사회제도라는 점은 수긍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생태계에 관심이 많은 철학자들도 지속 가능한 친환경사회의 수립 문제를 새로이 제기하되,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 지는 의무에 대한 버크의 신념은 공유한다.

     

    에드먼드 버크는 과거를 통째로 부정하는 프랑스혁명을 규탄했다. 그는 변화란 점진적으로 일어나야 한다고 믿었는데, 이런 생각은 현대 보수주의의 핵심이 되었다.” 

     

    출처:철학의 책, 윌 버킹엄 외 공저, 지식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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