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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다스리는 왕이다.’, 존 스튜어트 밀(서기 1806~1873년)philosophy/the age of revolution 2023. 2. 28. 16:56반응형
‘인간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다스리는 왕이다.’, 존 스튜어트 밀(서기 1806~1873년)
존 스튜어트 밀은 서기 1806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 역사가 제임스 밀은 제러미 벤담과 함께 ‘철학적 급진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존은 가정에서 아버지에게 교육 받았는데, 그 만만찮은 교육과정은 겨우 세 살 난 밀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일로 시작되었다.
다년간 공부에 매진한 밀은 20살 때 신경쇠약을 겪었다. 한편 그러기 전에 그는 대학을 떠나 동인도회사에 들어가서 1857년까지 몸담았다. 그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저술활동을 할 시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만난 여성인권옹호자 해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는 20년간 밀과 교제한 끝에 그의 아내가 되었다. 밀은 1865년부터 1868년까지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결정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리에 따라 내려야 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쾌락을 안겨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하며, 설령 그것이 자신에게 해롭더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인간은 타인에게 해로울 법한 일을 할 자격은 없다. 인간은 타인의 육체가 아니라 자신의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 일에 대해서만 실행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다스리는 왕이다.”-존 스튜어트 밀
지적 특권을 누리는 가정에서 태어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18세기 계몽기에 부각된 영국 철학의 전통을 어릴 적부터 잘 이해하고 있었다. 존 로크와 데이비드 흄이 확립한 새로운 경험주의 철학은 유럽대륙의 합리주의 철학과 극명히 대조되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는 유럽의 계몽주의사상이 영국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 영향이 낳은 가장 두드러진 산물인 공리주의는 바로 18세기 유럽, 미국의 혁명을 촉발한 정치철학의 영국식 해석에 해당했다. 공리주의의 창시자 제러미 벤담은 밀 일가와 친분이 있었는데, 실제로 밀의 가정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철학자로서 밀은 소중한 지적 유산을 새로운 19세기 계몽주의와 통합하는 일을 과업으로 삼는다. 그의 접근법은 (지식은 모두 감각경험에서 비롯하고 확실한 것은 없다고 주장한) 흄보다 덜 회의적이고 (만사를 평가하는 기준은 유용성이라고 주장한) 벤담보다 덜 독단적이지만, 그들의 경험주의와 공리주의는 밀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선배들의 사상보다 덜 극단적인 밀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은 혁명보다는 개혁을 겨냥했고, 결국 영국 빅토리아조 자유주의의 토대를 형성했다.
첫 번째 철학저작인 6권짜리 대작 [논리학체계]를 완성한 후 밀은 윤리학, 특히 벤담의 공리주의론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벤담이 주장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원리의 명쾌한 단순성에서 감명을 받았고, 그 원리가 유용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공리주의의 적용방식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예수의 ‘황금률’, 즉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윤리관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한다. 밀에 따르면 이는 “공리주의 윤리의 이상적 극치”에 해당한다.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낫다.” -존 스튜어트 밀
밀은 벤담의 행복원리를 지지하지만, 그것의 실용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벤담은 추상적인 ‘행복계산법’이 그 원리의 핵심이라고 믿은 반면, 밀은 그것을 현실세계에서 실행하는 방법을 찾고자 한다. 그는 도덕 판단을 내릴 때 그 원리가 얼마나 유용한가뿐 아니라 그것의 사회적, 정치적 함의에도 관심을 둔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장려하는 법률이 실제로 개인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것을 추구하며 다수결의 원칙을 채택한 법률이 사실상 누군가의 행복을 찾는 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밀에 따르면, 해결책은 교육과 여론을 연계하여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이익 사이에 ‘불가분의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항상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이익이나 행복을 추구하고자 할 것이다. 그의 결론에 따르면, 그러므로 사회는 행복 추구의 자유를 모든 사람에게 허용해야 한다. 그리고 이 권리는 정부가 보호해야 하며, 법률은 개인적 목표를 추구할 자유를 보호하도록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자유를 제한해야 하는 상황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의 행위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해로운 경우다. 이는 ‘해악의 원리’로 알려져 있다. 이 원리를 강조하려고 그는 그런 경우라면 “개인의 육체적·도덕적 이익이 정당한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신념이 있는 한 사람은 관심만 있는 아흔아홉 사람과 맞먹는 사회적 힘이다”-존 스튜어트 밀
그런 다음 밀은 행복을 측정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관심을 돌린다. 벤담은 행복계산법에서 쾌락의 지속시간과 강도를 고려했지만, 밀은 쾌락의 질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로써 그는 단순한 욕구 충족 및 감각적 쾌락과 지적, 문화적 활동으로 얻은 행복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있다. ‘행복방정식’에서 그는 저급한 육체적 쾌락보다 고급한 지적쾌락을 더 중요시한다.
이어서 밀은 자신의 경험주의적 배경에 따라 행복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는 묻는다. 사람들이 얻으려고 몸부림치는 대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행복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판단한다. “뭔가가 바람직하다는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바란다는 것이다.” 이는 다소 불만족스러운 설명 같기도 하지만, 이어서 그는 두 가지욕구 대상을 구별한다. 하나는 이렇다 할 이유 없이 욕구하는 대상(우리가 바라는 대상 중 자신에게 곧바로 쾌락을안겨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양심적 행동(의무감이나 자비심 때문에 하는 일, 보통 당장은 내키지 않지만 결국은우리에게 쾌락을 안겨주는 일)이다. 우리는 전자의 경우에는 행복의 일부러서 뭔가를 바라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행복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그것을 바란다. 그런 행복은 그 행위의 결과가 도덕적일 때만 느낄 수 있다.
‘원수를 돕는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성경 속 이야기에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밀의황금률이 잘 드러나있다. 밀은 이런 윤리관이 사회의 전반적 행복 수준을 높일 것이라고 믿었다.’
탁상공론만 하는 철학자가 아닌 밀은 자기 사상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정부 및 입법과 관련하여 자기 사상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고민했다. 그가 보기에 행복 추구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행위는 모두 압제였다. 그것이 (민주적 선거를 통한) 다수의 집단적 압제든 폭군 한 사람의 통치든 상관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가 개인에게 행사하는 힘을 제한할 방법, 개인이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를 보호할 실용적 방법을 제안했다.
하원의원 시절 밀은 수많은 개혁안을 내놓았다. 비록 그 개혁안들은 한참 후에야 실현되었지만, 그의 발언 덕분에공리주의 철학의 자유주의적 실용성이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철학자이자 정치가로서 밀은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는 한편 기본인권 신장을 주장하고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데 힘썼다. 이것들은 모두 그의 공리주의를 현실에 적용한 예다.
아내 해리엇 테일러 밀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그는 영국 국회의원 중 처음으로 정부 개혁의 일환으로 여성참정권인정을 주장했다. 또 그의 자유주의 철학에는 경제학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아버지와 달리 밀은 정부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옹호했다.
‘1868년 영국에서는 전국여성참정권협회가 설립되었다. 그러기 1년 전에 밀은 여성참정권을 보장하려고 1867년 개혁법의 개정을 요구했다.’
밀은 사회가 아니라 개인을 공리주의 철학의 중심에 놓는다. 요컨대 자신에게 해로운 짓을 할지언정 개인은 방해받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생각하며 행동할 수 있다. 밀의 [자유론]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다스리는 왕”이다. 빅토리아조 자유주의의 상징이 된 그의 사상은 유럽과 미국의 혁명을 일으킨 급진적사상을 완화하는 한편 그것을 권위의 간섭에 대한 자유 개념과 결합했다. 밀에게 이것은 (빅토리아시대의 중요한 이상인) 사회적 진보의 수단이자 올바른 정치의 기반이었다. 밀에 따르면, 사회가 사람들을 각자 자기 행복을 추구하며살도록 내버려 둘 경우 그들은 자기 잠재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사회에도 유익하다. 개인이 재능을꽃피우면 모든 사람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생전에 중요한 철학자로 평가받은 밀은 이제 흔히 빅토리아조 자유주의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공리주의에서 영감을받은 그의 철학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사회, 정치, 철학, 경제 사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신의 대부이자 스승이었던 벤담의 영향을 받아 공리주의를 사상의 기초로 하였으나, 쾌락의 계량 가능성을 주장한 벤담과는달리 쾌락의 질적인 차이를 주장하며 벤담의 사상을 수정했다. 밀은 인간이 동물적인 본성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질적으로 높고 고상한 쾌락을 추구한다고 보았다. 곧 “만족한 돼지가 되는 것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임이 좋고,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임이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법률에 의한 정치적 제재를 중시한 벤담과는 달리 양심의 내부적인 제재로서 인간이 가지는 인류애를 중시했다. 또한 현재 경제학은 밀이 공리주의를 자유시장에 적용한 방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토대로 형성됐다. 그런 해석을 제시한 대표적 인물은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다. 윤리학 분야에서는 버트런드 러셀, 칼 포퍼, 윌리엄 제임스, 존 롤스 등의 철학자들이 밀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출처:철학의 책,지식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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