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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역사는 모두 계급 투쟁의 역사다.’ -카를 마르크스(서기 1818~1883년)philosophy/the age of revolution 2023. 3. 28. 19:42반응형
‘지금까지의 역사는 모두 계급 투쟁의 역사다.’ -카를 마르크스(서기 1818~1883년)
복잡한 인류 역사를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19세기의 대사상가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대표작 [공산당선언]의 제1장 서두에서 그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역사적 변화는 모두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서 계속되는 갈등의 결과이며, 이 갈등의 근원은 경제 상태에 있다.
마르크스는 여러 시대에 걸쳐 나타나는 사회 본질의 독특한 핵심을 간파했다고 믿었다. 이전의 역사 접근법에서는 영웅과 지도자 같은 개인의 역할을 중요시하거나 사상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마르크스는 고대의 주인-하인, 중세의 영주-농노, 근대의 고용인-피고용인 등 사이에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집단갈등을 주목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혁신적 변화를 일으킨 것은 바로 이런 계급 간 갈등이었다.
“카를 마르크스가 저술 활동을 하던 당시 독일에서는 지적 논쟁이 성행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철학의 임무란 사상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을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썼다. 둘은 1830년대에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하다 만난 사이였다. 엥겔스가 경제적, 사상적 지원과 더불어 빼어난 글솜씨를 제공하긴 했지만, 마르크스는 그들의 공저 뒤에 숨어있는 진정한 천재로 인정받았다.
1840년대 초중반의 사적인 원고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하고자 했을 뿐이지만 중요한 문제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1850년대와 1860년대에 마르크스는 자기 사상을 다듬어 짧은 글을 여러 편 썼는데, 그 중 하나가 [공산당선언]이라는 40여 쪽짜리 소론이다.
[공산당선언]에서는 공산주의의 가치관과 정치계획을 설명하고자 한다. 공산주의는 소규모 신흥세력이던 독일 사회주의 급진파가 제시한 새로운 신념체계였다. 이 선언문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는 직접 충돌하는 두 계급으로 단순화되었다. 하나는 부르주아지(자본가계급)이고, 다른 하나는 프롤레타리아(노동자계급)다.
‘부르주아지(bourgeoisie)’라는 말은 중산층을 뜻하던 프랑스 고어 ‘burgeis’에서 파생되었다. 이들은 일반 서민보다 우위를 점한 부유층 상인으로, 자기 사업체를 소유하고 경영했다. 마르크스는 아메리카대륙의 발견 및 식민지화, 인도, 중국 시장의 개방, 교환 가능한 상품의 증가가 19세기 중반에 상공업을 급속히 발전시킨 방식을 설명한다. 수공예 장인들은 새로운 시장수요를 충족할 만큼의 상품을 더 이상 생산하지 못했고, 따라서 대규모 생산체계가 그들을 대신했다. [공산당선언]에서 말하듯, 시장은 계속 성장했고, 수요는 끝없이 증가했다.
“능력만큼 일하는 각자에게서,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각자에게로.” -카를 마르크스
부르주아지의 가치관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이 모든 거래를 통제하는 부르주아지는 사람들 사이에 “노골적으로 사익을 추구하고 무정하게 현금을 지불하는” 관계만 남겨두었다. 사람들은 한때 그가 어떤 사람인가로 평가되었으나, 부르주아지는 “사람의 가치를 교환가치로” 환원해버렸다. 도덕적, 종교적, 감정적 가치관은 내팽개쳐졌고, 그러는 사이에 과학자,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할 것 없이 모두 한낱 유급노동자로 탈바꿈해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정치적 ‘환상’을 “노골적이고 파렴치하고 직설적이며 야만적인 착취”로 대체해 놓았다. 한때 사람들의 자유를 보호하던 헌장은 내버려졌고, 대신 ‘부도덕한 자유, 즉 거래의 자유’가 들어섰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유일한 해결책은 모든 경제적 생산수단(토지, 원자재, 장비, 공장 등)을 공유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사회구성원 모두가 자기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할 수 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희생시켜가며 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사람들은 이런 집단을 형성한다.”,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뭉치는 집단.”,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이익에 상충하는 사람들과 맞서는 집단.”, “각 집단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는 생산수단 및 재산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 “프롤레타리아는 재산이나 사업체를 소유하지 못한다.”, “부르주아지나 지배계급은 국가의 재산과 사업체 대부분을 소유한다.”, “주 산업이 농업에서 공업으로 바뀔 때처럼 생산수단이 변하는 시기에는 혁명과 전쟁이 일어난다.”, “지배계급이 추방되고 새로운 계급이 등장한다.”, “역사란 이런 계급투쟁과 퇴거의 기록이다.”
변증적 변화
변화과정에 관한 마르크스 추론 이면의 철학은 대부분 선배인 게오르크 헤겔에게서 비롯했다. 헤겔은 현실이란 하나의 상황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 변화가 일어나는 까닭은 모든 관념이나 상황(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반은 변화를 유발하며 새로운 관념이나 상황(합)을 낳는다. 이런 과정이 이른바 변증이다.
헤겔에 따르면, 우리는 보이는 대로의 세계만 경험할 뿐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결코 경험하지 못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존재는 무엇보다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변증을 무수히 반복하는 역사라는 여행은 본질적으로 정신이 절대적 조화 상태로 나아가는 진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헤겔과 마르크스는 생각을 달리한다. 마르크스는 그 과정이 정신적 발전이 아니라 실제 역사적 변화의 여정이라고 강조한다. 마르크스는 그 과정의 끝에 있는 갈등해소 상태란 헤겔이 예상한 정신적 행복이 아니라, 모든 이가 조화롭게 일하며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완벽한 사회라고 주장한다.
“각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은 항상 지배계급의 사상이었다.” -카를 마르크스
계급의 형성
옛날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옷, 음식, 거주지 등)의 생산을 전부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 그러나 초기 사회가 형성됨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더 서로 의지하게 되었다. 결국 이런 상황은 스코틀랜드 경제학자·철학자 애덤 스미스가 말한 ‘흥정’ 행위를 낳았다. 사람들은 상품이나 노동을 교환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교환체계 때문이 사람들이 자기 일에 전문가가 되었다는 스미스의 의견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는 이 새로운 전문분야(직업)가 사람들을 규정짓게 된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한 사람의 전문분야, 즉 직업이 무엇인건 간에(농업생산자든 세습지주든) 그 직업은 그가 사는 곳, 먹는 음식, 입는 옷을 규정지었다. 뿐만 아니라 직업은 사회 내에서 이익을 자신과 공유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자기 이익에 상충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규정지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런 상황은 갈등이 불가피한 사회적·경제적 계급을 뚜렷이 형성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류 역사에는 네 가지 주요 단계가 있었다. 그는 이들 단계가 네 가지 재산소유 형태에 기초했다고 본다. 원시부족의 공유재산체제, 고대 공동체 및 국가의 소유권체제(이때 노예제도와 사유재산제도가 시작되었다), 봉건체제(사유지체제), 근대 자본주의 생산체제가 그것이다. 각 단계는 서로 다른 경제체제, 즉 ‘생산양식’을 나타내고, 각 단계 변환은 전쟁과 혁명처럼 지배계급이 교체되는 격렬한 정치적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공산당선언]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재산소유체제를 이해하면 그 시대 및 사회의 사회적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널리 알렸다.
“18세기말~19세기에 부유한 부르주아지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지만, 그들의 공장과 사유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끔찍한 빈곤에 허덕였다.”
문화제도의 발전
또 마르크스는 사회의 경제기반을 분석하면 재산체제의 변화에 따라 사회의 ‘상부구조(정치, 법률, 예술, 종교, 철학 등)’도 변함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상부구조가 발전하면 그것의 가치와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정치적 현실에 대한 관심이 분산됨에 따라 지배계급이 이득을 보게 된다. 그러나 사실상 이 지배계급도 사건이나 제도를 결정하지 않는다. 헤겔은 모든 시대가 시대정신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했고, 마르크스도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헤겔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는 절대정신이 시대정신을 규정짓는다고 생각한 반면, 마르크스는 해당 시대의 사회적·경제적 관계가 그것을 규정짓는다고 본다. 즉 그 관계가 개인과 사회의 사상이나 ‘의식’을 규정한다고 본 것이다. 마르크스의 관점에 따르면, 사람들이 시대를 특정 형태로 만들어 특징 짓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사람들을 규정짓는다.
마르크스가 정신의 여정에서 사회적·경제적 생산양식의 여정으로 헤겔철학을 수정한 데는 또 다른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안드레아스 포이어바흐도 영향을 미쳤다. 포이어바흐는 전통적 종교란 지적 허구(추론으로 입증할 수 없는 호구)이며, 전반적인 인간 불행의 원인이라고 믿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은 인간의 최고 덕목을 융합한 이미지로 신을 만든 후, 그 신에 집착하며 종교를 발명하고는 현실세계보다 자신의 ‘꿈’을 선호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신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신과 신을 부정적으로 비교하면서 자신에게서 멀어진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종교에 집착하는 이유가 자아가 경멸당하고 소외되지 않는 곳을 갈망하기 때문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경멸과 소외의 원인이 어떤 권위적인 신이 아니라 실제 일상 속의 물질적 현실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답은 종교의 종말뿐 아니라 전면적인 사회적·경제적 변화에 있다.
“진짜 행복을 얻으려면 가짜 행복인 종교를 폐지해야 한다.” -카를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이상향
[공산당선언]에서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등장하기까지의 인류 역사를 개괄적으로 설명할 뿐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에 관해 다양한 주장을 내놓는다. 예컨대 그 선언문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체제는 착취적일 뿐 아니라 본래 재정적으로 불안정하다. 그래서 점점 심각해지는 상업적 위기가 되풀이되고, 가난한 노동인구가 늘어나며, 유일하게 진정한 혁명적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가 출현하게 된다. 결국 역사상 최초로 혁명적 계급이 인류 대다수를 대표하게 될 것이다.
이런 발전은 점점 복잡해지는 생산공정의 본질이 뒷받침한다. 마르크스의 예상에 따르면, 과학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실업률이 증가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생산수단에서 소외될 것이다. 그 결과 사회는 두 계층, 즉 빈곤한 다수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부리는 소수로 분열될 것이다. 변증법의 원칙을 따라 이런 갈등은 새로운 무계급사회를 세우는 폭력혁명을 낳을 것이다. 그 혁명으로 세워진 사회는 갈등이 없는 이상향으로, 번증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 완벽한 사회는 관리만 필요할 뿐 통치는 필요 없으며, 그 관리기능은 혁명을 이끈 공산’당(黨)’이 수행할 것이다(마르크스가 말한 공산당은 특정 조직이 아니라 대의명분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 새로운 유형의 국가(마르크스는 이를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라고 불렀다)에서는 사람들이 참된 민주주의와 사회적 재산소유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의 예상에 따르면, 완벽한 사회에 이를 이 마지막 생산양식의 변화가 일어난 직후에는 앞서 이해한 바대로 정권이 종말을 고할 것이다. 그때는 정치적 의견 차이나 범죄행위가 나타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산업혁명기에는 전문기능직이 유급일자리로 공식화되었다. 그후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비슷한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 즉 계급을 형성했다.”
정권
마르크스는 유럽에서 부르주아지와 유급노동자의 격렬한 계급투쟁의 성과가 뚜렷이 드러나려면 사람들 대다수가 재산을 잃고 마지못해 품을 팔아야 하리라고 예측했다. 그래야 다수의 빈곤과 소수의 엄청난 부가 점점 더 분명히 대비되고, 공산주의의 매력이 점점 더 커질 듯 싶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보기에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세력은 특권을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역사상의 어느 시대에서나 지배계급은 경제적 우위를 강화할 목적으로 정부와 법을 통제하는 이점을 누려왔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근대국가는 사실상 “부르주아지 계급의 일을 돌보는 위원회”이며, 우리 이익도 고려해달라는 소외된 집단의 투쟁(참정권 확대를 요구하는 투쟁 등)은 더 근본적인 경제적 갈등이 단기적으로 표출된 방식일 뿐이었다. 마르크스가 생각하기에 정치적 이익이나 정당은 지배계급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것들은 권력 획득 및 유지를 위해, 대중을 위한 것처럼 보이도록 조작되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청년헤겔학파 활동과 이론연구에서 헤겔철학의 타협적 경향,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 그 원리와 현실의 사회관계 및 변혁의 과제 사이의 불일치를 발견하고 헤겔로부터 이탈, 더 나아가서는 청년헤겔학파에도 만족하지 않고 포이어 바흐의 유물론으로, 또한 현실에 관한 경제적인 연구로 나아갔다. 거기에서 그는 혁명적 민주주의로부터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로, 노동자계급의 입장으로 혁명적 변화를 수행했다. 이는 유럽에 있어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진전과 실레지엔 지방 섬유 노동자의 봉기, 그리고 파리에서의 그 자신의 혁명적 투쟁에의 참가가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했다. 1847년에 마르크스는 브뤼셀에 살면서 비밀결사 ‘공산주의자동맹’의 기틀을 잡고, 제2차 대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대회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강령의 초안을 의뢰했고, 이렇게 해서 [공산당선언]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공산당선언]이 출판된 직후 사회주의에 고취된 혁명이 유럽을 휩쓸었다. 1848년 파리에서 일어난 2월 혁명도 그 중 하나다.”
혁명으로 가는 길
마르크스의 독창성은 새로운 사상을 창조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상을 조합한 데 있다. 그가 끌어다 쓴 식견의 출처는 게오르크 헤겔과 루트비히 안드레아스 포이어바흐 같은 독일 관념론자, 장 자크 루소 같은 프랑스 정치이론가, 애덤 스미스 같은 영국 정치·경제학자 등이다. 게다가 19세기 전반기에는 사회주의가 정치강령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거기에서 마르크스는 재산, 계급, 착취, 상업적 위기에 관한 몇몇 식견을 이끌어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작성했을 당시에는 계급투쟁의 기운이 한창 감돌고 있었다. 그가 선언문을 쓴 직후인 1848년과 1849년에는 유럽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군주제에 저항한 혁명이 잇따라 일어났다. 이전 몇 십 년간 유럽대륙에서는 비록 영국과 달리 산업발전이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했다. 가난한 자들이 현 상황에 대해 느낀 불만의 물결을 여러 자유주의· 국가주의 정치가들이 이용해ㅓㅁㄱ었고, 유럽 전역에서 혁명의 잔물결이 일었다. 하지만 이런 반란은 진압되었고, 영구적 변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에 [공산당선언]은 러시아와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혁명의 기운을 불어넣으며 상징적 지위를 얻었다. 하지만 탁월하ㅏ다고 여겨지던 마르크스 이론은 사실상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스탈린주의자 치하의 러시아, 마오쩌둥 치하의 중국, 폴 포트 치하의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탄압을 정도는 마르크스가 내놓은 정치·역사 이론의 신빙성을 크게 떨어뜨렸다.
“한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카를 마르크스
마르크스주의 비판
마르크스는 그런 농업 위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가 그렇게 야만적인 방식으로 실행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점을 접어두더라도 그의 사상은 여전히 여러가지 비판을 받기 쉽다. 첫째, 마르크스는 항상 혁명의 불가피성을 옹호했다. 이는 그 변증의 핵심이었지만, 누가 봐도 지나치게 단순하다. 인간의 창의력은 늘 선지를 다양하게 제시할 수 있다. 그 변증에서는 점진적 개혁에 따르는 진보의 가능성을 감안하지 못했다.
둘째,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좋은 속성만 부여하는 한편, 공산주의 사회가 어쨌든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낳을 것이라고 언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그 완벽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국가가 이전의 야만적 독재국가와 어떻게 다를지도, 권력에 따르는 부패를 그 국가가 어떻게 피할지도 설명하지 않았다.
셋째, 마르크스는 성공적인 혁명 후에 자유를 위협하는 요소가 새로이 나타날 가능성은 좀처럼 논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이 사실상 범죄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가정했다. 또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이들에 따르면, 그는 국가주의의 영향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더러 정치에서 개인 지도자가 수행하는 역할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 실제로 20세기 공산주의운동은 공산주의자가 정권을 장악한 모든 나라에서 막강한 개인숭배를 낳았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국가들은 자국을 유토피아로 선전했다. 그들은 새로이 해방된 행복한 국민의 업적을 미화하는 그림과 조각상을 쏟아냈다.”
지속적 영향
마르크스 이론이 야기한 위기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후대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다. 상업자본주의의 유력한 비평가로서, 경제 및 사회주의 이론가로서 마르크스는 오늘날의 정치 및 경제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인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대부분 [공산당선언]은 천재의 작품이라는 20세기 러시아계 영국 철학자 아이자이어 벌린의 견해에 동의할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혁명사상가는 독일 트리어(Trier)시에서 태어났다.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변호사의 아들 카를 마르크스는 본(Bonn)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는데, 이때 장차 아내가 될 예니폰 베스트팔렌(Jenny von Westphalen)을 만났다. 그후 베를린대학에 들어가 학업을 마치고는 신문 편집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그가 민주주의를 두둔한 글을 프로이센 왕가에서 검열하는 바람에 그는 파리와 벨기에에서 추방되었다. 한편 그러는 동안 그는 독일인 동료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합작하여 독특한 공산주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잇따라 일어나던 1848~1849년에 독일로 돌아갔다. 그러나 혁명이 진압된 후 그는 죽는 날까지 런던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마르크스와 아내는 극도로 가난하게 살았으며, 그가 64살의 나이로 죽었을 때 장례식에는 조문객이 11명뿐이었다.
(출처:철학의 책, 지식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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